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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기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서 나올 때,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이른 아침 일어나 아침 준비해서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등원시키기까지 쌓이는 피로를, 아니 그 전날부터 쌓였던 피로를 커피 한 잔으로 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외투를 벗자마자 냉동실에서 커피콩을, 부엌 선반에서 그라인더를 꺼낸다. 그리고 콩을 갈면서 꿀같은 휴식 시간을 시작한다.

 

2. 오랫만에 밤에 일어나 일을 했다. 공고 연구 중 수업 부분을 대학원 전공 세미나에서 발표하려고 다듬는 중인데 생각보다 진도가 안나가서 고생 . 새벽 3시쯤 드래프트를 겨우 마무리를 해서 공동연구진인 박선생님에게 보내고 나니 마음이 왠지 허하다. 인터넷 공간을 여기저기 쏘다녀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마침 잠이 깬 Y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4시가 다 돼서야 자리에 다시 누웠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더 좋은 논문을 쓰고 싶다는 마음과 현실의 조건이 충돌을 하고 있다. 아니, 현실의 조건이 아니라 엄마로서 아이와 보내야할 시간의 절대량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갈등하는 것이겠지. 두 마음 모두 내 마음이니 다 받아줘본다. 연구자로서도 엄마로서도 나는 길 위에 있을 뿐이고, 그저 내 길을 타박타박 걸어갈 수 있을 뿐.

 

3. 겨울의 중간 즈음, 아파트 나무들을 정리하는 작업이 한창일 때 아기와 내가 하나씩 주워온 작은 나뭇가지들이 있다. 잎눈이 조롱조롱 달린 모양이 예뻐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이 담긴 병에 꽂아뒀더니 그 중 하나에서 잎이 돋았다. 꽃샘추위 매서워도 볕 잘드는 남향 베란다는 따뜻한지, 지난 주 처음 움을 튼 연두잎들이 쑥쑥 자라고 있다. 올봄 첫 연두잎. 보드랍고 연한 이파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무도 부러울 것 없는 기분이 든다.

 

4. 종종 강선생님 생각이 난다. 그에게 빚을 많이 졌다는 걸, 보내놓고 나서야 절절히 알겠다. 새 기관, 새 일터에서 모두들 쭈볏거릴 때, 그가 거리낌없이 다가와주고 간섭하고 주저없이 사랑한다 존경한다 말해준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더 끈끈하고 단단한 거구나 싶다. 에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는 하쿠와 예전에 만났던 사이라는 걸 헤어지기 직전에 기억해낸다. 그리고 다시 이별할 때, '꼭 다시 만나'라고 작별 인사를 건넨다. 그 때 하쿠가 대답한다. '그럼, 물론이지.' 재회의 확신 혹은 확신하는 재회. 그 믿음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 모르면서도 마냥 그 장면이 좋았다.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를 다시 만나 같이 일하고 공부할 거라는 확신이 내 마음 속에 있다. 그 믿음으로 서운함을 위로하는 요즘.

 

5. 권나무라는 가수의 '노래가 필요할 때'최근에 듣게 됐다. 오늘은 종일 이 노래 들으며 추위를 견딜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