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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에걸리지않는/황홀한일상

20년만에

새빨간꿈 2015. 3. 27. 12:31

어제 저녁, 스무살 때 만났던 여자 친구들을 이십년만에 만났다. 나를 제외하곤 다들 가끔 만나왔던 것 같지만, 이렇게 여럿이 한꺼번에 모인 자리는 처음이라 그런지 다들 들떠있었다. 두근대는 마음 때문에 약속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부자연스러울 정도였다. 모임이 정해지면서 의기소침한 마음도 있었다. 나만 아줌마로 촌스럽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데 막상 만나서 눈맞추고 이야기 나누니 내 처지를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는 마음보다는 잘 살고 있는 친구들 모습에 안도하는 마음이 더 크게 났다. 좀 신파같기도 하지만, 지난 이십년 동안 죽지도 많이 아프지도 않고 이렇게 건강하게 만날 수 있어서 고마웠달까.

 

아기엄마가 셋, 싱글이 셋이었는데, 서로의 상황을 무턱대고 부러워하거나 동정하지 않았던 것도 좋았다. 아기를 낳아서 키우는 일이 일하는 여성에게 얼마나 고된지,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싱글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차별적인 경험인지에 대해서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게 참 다행이다 싶다. 무엇보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태도 덕분이었던 것 같다. 누구도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지도 않았고 누구도 가만히 침묵하지도 않았던 자리. 나에게는 뭔가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고 내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주로 들었다. 들으면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좋았고, 친구들 이야기가 재미있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스무해 전 우리는 참 선택받은 애들이었는데, 동시에 그 상황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었다. 입시명문이라는 재수학원에 다니는, 전국에서 모인 수재들. 게다가 여자 아이들이었으니 그 학원에서조차 희귀한 존재들이기도 했다. 연말에 있을 입시를 향해서 기약없는 마라톤을 하던 그 1년, 이 여자 친구들과 아침과 점심, 오후와 저녁을 공유할 수 있어서 견뎠던 것 같다. 우리끼리 갈등도 있고 싸우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가까워지기도 했지만, 그 시절 가장 가까이에서 많은 것을 나누었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서로의 하숙집에 들러 밥도 얻어먹고, 한 번은 멀리 춘천까지 당일치기 여행도 했고, 연세대 잔디밭에 모여 술도 진탕 한 번 마셨던 적도 있다.ㅋ 모두의 입시 일정이 마무리되던 이듬해 이월엔 비행기 타고 제주 여행도 했다. 아무 것도 아닌 아이들이 모여서 공유했던 어둡고 밝고 재미있고 지루하고 막막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 덕분에 이십년만에 다시 만나 또 웃고 눈 마주치고 손 맞잡으며 다시 만나자 헤어질 수 있었던 거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