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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와 텃밭에 갔다. 빨갛게 익은, 달고 신 딸기 일곱 알, 내 손바닥만한 가지 한 개, 루꼴라 잎 한 봉지, 상추 이파리 한 봉지 그리고 내일 아침 된장국 끓일 근대 한웅큼. 오늘의 수확물들. 아이는 딸기를 물에 씻어 그늘 밑에 앉아 먹으며 아아아- 맛있다!를 연발한다. 작고 빨간 딸기를 아이의 작은 입에 넣으며 짓는 그 충만한 표정. 내가 한창 풀매기에 열중하는 동안 혼자 놀던 아이가 소리 친다. 이야- 저 새 너무 이쁘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아이가 가르키는 곳을 보니 노랑과 회색이 섞인 깃털을 가진, 비둘기보다는 작고 참새보다는 훨씬 큰 새 한마리가 어느 밭 장대 위에 앉아있다. 와- 진짜 이쁘네. 맞장구 쳐주며 나도 아이도 한참 새를 쳐다보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2. 돌아보니 휴직을 한 지 칠개월이 다 되어간다. 시작할 땐 일년이 길게만 느껴졌는데, 벌써. 그동안 나에게 어떤 일이 지나갔는지 돌이켜보는데 생각이 잘 안난다. 나는 그저 매일 아침 일어나 아이 밥 먹을 것 챙기고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같이 버스나 택시를 타고 다니고 또 밥을 먹이고 치우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재우고 놀고 웃고 울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이렇게 가버렸다. 아이와 단둘이 텃밭에 다니고 미술관과 공원에 가고 손을 꼭 잡은 채 노래를 부르며 길을 걷고 바람이 지나가는 나무를 올려다보고 빗방울을 피하려고 같이 뛰고 깔깔깔깔 같이 웃었던 기억 밖엔 없는데. 손에 잡히는 어떤 성과도 없는 몇 개월. 덩어리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오직 매일 매순간의 활동과 감정과 이야기만이 있는 시간들. 나는 이런 시간들이 낯설어 때로 지겨워하고 우울해하고 외로워하고 쓸쓸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동시에 충만하고 흥분되었던.
3. 박사과정 때였나. 삼일동안 매일 여덟시간씩 강의를 했던 적이 있다. 악명높은 방송대 출석강의. 삼일 째 되던 날 오후, 내 목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고, 온 몸이 텅 빈 느낌이었다. 미아에서 강의를 마치고 낙성대 집까지 돌아왔을 때, 다리가 후들거려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저녁 먹으며 맥주 몇 잔 하고선 쫑알쫑알 더 신나서 떠들고, 급기야 노래방에 가서는 목이 쉬어 더 나올 수 없을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그 때 나는 쉬고 싶었던 게 아니라 놀고 싶었던 거 같다. 전업으로 아이를 돌보는 요즘도 가끔 그런 순간이 온다. 너무너무 피곤해서 몸이 종잇장처럼 느껴지고 눈이 막 감겨오는 순간이지만, 난 지금 쉬고 싶은 게 아니라 놀고 싶어- 하면서 냉장고 속 맥주를 꺼내고 노트북을 켜고 음악을 틀고... 그리고 블로그를 연다.ㅎ
4. 휴직을 시작하던 2014년 11월, 아이와 남편과 나는 제주 여행을 했다. 예년보다 날이 차서 가져간 모든 옷을 껴입고도 늘 추웠고, 이박삼일이 너무 짧아 허둥지둥 하기만 하다 돌아온 것 같다. 더구나 '휴직은 했으나 보고서가 끝나지 않은 (이상한) 상태'라 여행 중에도 나는 새벽에 혼자 일어나 보고서 수정을 했다. 새벽엔 학습부진 학생을 위한 지역사회 연계를 고민하다 아침이 되면 오늘 어딜 가볼까 고민하는 여행의 시간.ㅋ 몸도 마음도 피곤했던 시간이었는데, 간만에 사진을 꺼내 보니 참 좋았던 기억만 새겨져 있는 것 같다. 협재 바닷가에 도착했을 땐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몸도 마음도 바람 따라 우우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는데, 그 순간에도 아이는 모래를 만지고 장난을 치고 바다와 바위의 색을 유심히 보았다. 나도 아이 따라 백사장의 모래를 들여다보고 지나는 바람의 속도를 견뎠다. 그 순간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칠개월도 안지났는데, 그 시간의 내가 아득하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걸 보면 이번 휴직은 성공적인 건가?ㅋ
5. 가끔은 그립다.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인터뷰를 하고 연구진 회의를 하고 꿈 속에서도 타이핑을 하던 그 순간들. 너무 끔찍해서 평생 이런 일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게 절망스러웠는데, 벌서 그립다니. 아무래도 이 휴직은 성공적인 게 분명해.ㅋㅋㅋ
6. 자주 그립다. 나의 동료들, 너무 이쁜 사람들. 며칠 전 우리 노조 1주년 기념식 동영상을 보면서 나혼자 히히덕 웃고 질질질 울었다. 하필 그날 아이가 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일찍 자리를 뜨느라 나는 기념식 자리에도 같이 못하고 말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 참 오랫만에 마음으로 좋아하는 우리 공동체. 그 속에서 우리가 나눈 것들, 내가 빚진 것들,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참 많다. 그래서 복직이 기다려진다.
7. 텃밭에 가면, 작은 변화들을 눈여겨 보게 된다. 그동안 꽃이 피었나, 얼마나 자랐나, 해충이 온 건 아닌가, 열매는 맺혔나, 잡초는 얼마나 자랐나. 거름을 하고 겹눈을 꺽고 풀을 매고 흙을 다듬어 주기 위해선 작은 변화도 놓치면 안된다. 내 옆에서 자라는 아이에게서도 늘 작은 변화들이 감지 된다. 어제까지 세지 못했던 수를 거뜬히 세고, 웃는 표정이 더 미묘해지고, 고집 피우지 않았던 대목에서 빽- 소리 지르며 땡깡을 부리고. 매일 아이는 달라진다. 나도 이렇게 성장하는 작물들과 아이 옆에서 변화하고 있는지. 뭐가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조금씩, 매일.
8. 세상은 시끄럽고 일터도 들썩인다. 마치 섬에서 사는 듯, 나는 세상과 떨어져 여기 작은 집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다. 이 시간이 한시적이란 게 다행이고, 동시에 두렵다. 세상과 마주대하며 그 안에서 일하고 관계 맺고 꿈을 꾸는 일은 지금의 내 시간과 동떨어진 일은 아닐텐데, 지금은 그 모든 게 멀게만 느껴진다. 나는 내 아이의 엄마 그리고 연구자, 한 사람의 여성이며 시민. 앞으로의 내 삶 속에서 섞여 들어갈 이 정체성들. 초여름밤, 내 마음 속을 혼란스럽게 혹은 들뜨게 만든다. 휴직 칠개월 째. 아 들뜨고,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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