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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결혼 준비를 하고, 결혼식을 '해내고', 신혼여행을 갔던, 이천육년 겨울에서 이천칠년 봄까지의 기간동안 나는 무척 우울했던 것 같다. 그 기간의 일기들, 사진들을 보면 결혼을 둘러싼 고민들 속에 파묻혀서, 그러나 어찌됐든 결혼이라는 걸 수행하고 있는 내가 발견된다. 그 기간의 우울에는 많은 설명들이 붙어야하겠지만, 커다란 괴로움 중 하나는, 나에게 의미있는 타자들이었던 페미니스트 친구들이 모두들 내 결혼을 '배신' 내지는 '전향'으로 여기고, '난 그 결혼에 반대요!' 혹은 '니가 왜 결혼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시간이 지나고 내 결혼을 반대하던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만나게 된 지금에도, 그 친구들이 건네는 어떤 대사들, 예컨대 "넌 결혼했잖니!" "니는 결혼해서 몰라!"와 같은 말들에는 나도 모르게 민감한 반응을 하게 된다.

오늘은 ㅅㄹ과 통화를 하면서, ㅅㄴ언니가 수술을 하게 된 일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대화가 오갔다.
(ㅅㄹ과 ㅅㄴ언니는 모두 비혼.)

ㅅㄹ: 그래, 언니가 그렇게 많이 아픈 것은 아니지?
나   : 응, 내가 검사 결과 나올 때 같이 있어서 아는데, 그냥 단순한 혹이래. 
        다만 크기가 좀 커서 수술을 해야하는 거고. 난 그래서 언니 수술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 안해...
ㅅㄹ: 야, 수술이 왜 심각하지 않냐. 난 심각하게 생각해. 
        넌 결혼해서 몰라! 언니한텐 큰 일이지. 그동안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심란했는데...!
나   : (갑자기 욱-) 아니 수술이 심각한가 아닌가랑 결혼이 무슨 상관이야?!
ㅅㄹ: 상관있지. 니는 결혼해서 몰라. 혼자 사는 사람한테는 심각해... 돌봐주는 사람도 없고...!

밑줄 그은 저 문장들 때문에 화가 났지만, 길게 통화하지 않고 서둘러 끊었다. ㅅㄹ이랑 그 문제로 토론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전화를 끊고서도 계속해서 저 문장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그랬을까.

여자들의 삶에 결혼 여부는 엄청난 변수가 된다. 결혼한 여자는 비혼인 여자에 비하여 경제적, 정서적 의존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갑작스러운 병이나 사고와 같은 예기치 않은 문제들을 만났을 때 안전망도 훨씬 두텁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그 안전한 세계로 들어왔다. ㅅㄹ이 내게 던진 저 문장들은 이런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나는 왠지 저 문장들이 부당하게 느껴진다. 당연하겠지만, 모든 결혼이 다 안전망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지옥같은 결혼 생활도 있고, 혼자 사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결혼 관계도 있다. 또 모든 비혼 여성들이 불안전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비혼 여성과 기혼 여성의 경계는 늘 변화가능하다. 나에겐 우에노 치즈코(2008)의 [화려한 싱글, 돌아온 싱글, 언젠간 싱글]이라는 책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는데, 결혼한 여자들이 자신의 삶 전체를 그 결혼 관계에 거는 시대가 이제는 아니다. 나도 언제 '돌싱'이 될지 모르고, 또 "언젠간 싱글"이 될 것이다. 또 비혼인 그녀들이 언제 결혼 관계 안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혼을 했다는 사실 하나로 단정지을 수 있는 것들의 범위가 어쩌면 굉장히 좁다. 개별 여자들의 삶을 평균적인 지표와 경향성으로만 이야기할 수 없는 만큼.

한편으로는 "넌 결혼했잖니!"라는 말을 듣고싶어하지 않는 내게는, 내가 결혼으로 가진 것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특권을 가졌다는 것은 이 바닥에서 언제나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니깐. 그러나 그러한 것들에 대한 인정, 반성, 성찰과 별개로, 나는 여자들 간의 대화가 "넌 00 잖니!" "넌 00해서 몰라!"와 같은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정체성만으로 경험이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정체성은 복수니깐. "너는 00한 여자다!"하는 정의를 내리기 보다는, 서로 들어주고 헤아려주고 나누었으면 좋겠다. "넌 결혼했잖니!"라고 말하는 순간, 사실은 비혼 여성과 기혼 여성들 간 대화는 불가능해져 버리는 거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