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 냇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 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 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 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
토론토 생활 십이일째 _ 2009년 11월 30일 월요일 어제 저녁에 를 읽다가, 뒤에 붙은 김윤식 선생님의 작품 비평을 봤다. (역시 대가의 소설엔 대가의 비평이 붙는 건가. 소설도 소설이지만 이 비평도 참 재밌다.) 이 비평에서 김 선생님은 기억에 의존하여서만 썼다는 박완서 선생님의 이 작품이야말로 소설다운 소설임을 치하하며, 헤밍웨이를 인용하여 소설이란 '남에게는 받아쓰게 할 수 없는 기억'을 쓰는 것이라 설명한다. '남에게는 받아쓰게 할 수 없는 기억.' 소설다운 소설은 바로 이 기억을 묘사한 작품일 것이다. 내 생각엔, 논문다운 논문이라는 것도 바로 이 기억, 남의 글과 말을 빌려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기억을 학문적으로 써낸 글일 것이다. 그래서 좋은 논문이란 가장 주관적인 주제로부터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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