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수업이 있는 화요일. 학생들이 뭔가를 읽는 동안 나는, 햇살이 길게 교실 바닥에 들어와 앉아있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간이 아주 천천히 지나가는 그 순간의 평화. 교실은 많은 것이 생동하기도 하고, 많은 것을 가라앉히기도 하는 요술 공간. 거기서 빛나는 문장들과 보물같은 단어들, 그리고 아름다운 우주들을 만난다. 2. 세시간, 길지 않은 시간인데, 교실을 나서면 곧장 피로가 몰려온다. 저녁을 먹으며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시켜 왔더니 연구실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 앉아, 가시지 않은 피로감을 어깨에 얹고 어떤 인터뷰이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남편은 어떤 분이셨어요? 하니까, "음 (침묵 6초), 근까 (침묵 3초)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은 사람이에요" 하는데 빵 터졌..
1. 흐린 날엔 음악이 더 잘 '느껴진다.' 흐린 봄날, 아침부터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다. 들을 때마다 좋다. 변태처럼 반복, 또 반복. 가만 보니 난 좀, 촌스럽게도, 드라마틱한 곡을 좋아하는 것 같다. 심각함과 가벼움, 어두움과 밝음이 왔다갔다 적절히 잘 배합된. 자자자장! 하면서 너무 장중해도 싫고, 짜자잔~ 너무 화려해도 싫다. 그래서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이 좋다. 다른 악장들은 지나치게 장중, 심각하거든. 사람도 그런가, 싶다. 지나치게 확신에 차있거나, 심하게 머뭇거리거나 대책없이 화사하면 매력을 못느끼겠다. 분명 아주 스마트한 사람인데, 그럼에도, 이것과 저것을 두고 좀 망설이고, 좀 헷갈려하고, 좀 판단을 유보하는 듯한 사람을 보면 확 끌린다. 그건 아마 나라는 인간이 어떤 순간..
1. 오전 내내 학교 오기 싫어서 집에서 낑낑. 결국, 오늘 점심 약속이 있다는 걸 11시 넘어서야 발견, 후다다닥 왔음. 긴 직장생활과 출산, 육아 후 학교로 돌아온 J언니와 밥 먹고 차 한 잔 사서 빈 연구실에 마주 앉아 질적 연구와 인터뷰, 구술생애사와 박사논문, 공부와 육아, 외모와 다이어트에 관해 한 시간 반동안 이야기이야기이야기. 학교를 이렇게 오~래 다니면서, 아직도 이렇게 좋은 사람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들이 있다는 거 분명 행운. 근데, '괴물'이 안될려면 남 이야기 많이 들어야지, 하고 어제 다짐했는데, 오늘도 내 얘기만 좀 많이 한 것 같기는 하고. 2. 체중이 적게 나가고 헤어스타일이며 옷이며 이쁘게 하고다녔던 시절엔 회사생활 포함 일상이 훨씬 편하고 좋았다는 J 언니의 회상...
1. 몸이 좀 안좋아서 오전엔 골골. 오후엔 강의계획서 확정을 목표로 내내 붙들고 있었는데 좀전에 겨우 완료했다. ('인터넷 서핑하면서 할일 미루기' 종목이 있다면 금메달 자신있다.) 수업의 방향을 정하고 꼼꼼하게 구체적인 부분들을 디자인한 뒤 예쁘게 편집까지 하고 나니, 새롭게 만날 학생들이 본격 기대되는군. 수업이라는 건, 완벽하게 하려면 한없이 부담스럽지만, 실험하고 연습한다 생각하면 한 학기 내내 노는 기분으로 진행할 수 있는 묘한 것. 실은 논문이나 다른 일들도 비슷하겠지.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이 내 공부와 삶에 자극을 주고 나라는 인간을 성장시켜주는 계기가 된다는 게 좋다. 이렇게 보면, 참 감사한 일이다, 가르칠 수 있다는 것. 2. 나의 이십대를 함께 보낸 (몇 안되는) 소중한 인연 중 한..
1. 들뜬 기운이 가득하던 어제, 개강날, 띠동갑 녀석이랑 점심을 같이 먹었다. 지난 가을 쯤 알게 된 이 녀석은 제대한지 한 학기 지난 복학생이다. 아, 신입생도 아니고 복학생이랑 띠동갑이라니! 어느새 내 나이가 이렇게 되었구나 하는 한탄의 마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는데, 저절로 시대와 경험의 차이, 그리고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녀석과 비슷한 점이 의외로 많이 있다. 이 동질감이 만나서 밥을 먹고 이야기 나누게 했겠지. 차이 속의 동질감, 동질감 속의 차이, 이런 게 관계를 풍요롭고 재미있게 하는 법. 그래서 이번 학기가 흥미진진 기다려진다. 흐흐. 2.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갑자기 좋아져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듣고 있음. 예전엔 피아노나 첼로 독주곡이 좋았다..
2011년 1월 어느 날 @ 서울대 정문 가는길 1. 국립민속박물관 근처에 'NONO' 라는 까페가 있다. 며칠 전 삼청동 갔다가 다리도 아프고 시간도 남아서 우연히 들어갔는데 오앗, 커피맛이 일품이다. 부드러우면서도 향이 살아있는? 아메리카노 혹은 까페라떼 추천. 라즈베리 어쩌구 하는 긴 이름의 치즈케잌도 맛있음. (열~씨미 논문 쓰다가) 날 좋은 봄날, 이 까페 가서 커피 한 잔이랑 치즈 케잌 먹자,하고 속으로 나한테 말해준다. 무조건 힘을 내야 할 어떤 순간, 커피와 치즈케잌이 자가발동기의 모터를 돌리게 하리라. 2. 소 스물일곱 마리를 맨손으로 넘어뜨리고 그 중에 네 마리를 즉사하게 만들었다는 최배달이 그 비법을 묻는 아들에게 알려준 딱 세 가지 조건: 1) 백미터를 십일초 대에 달릴 것, 2) ..
1. 봄비 오시는 일요일 오전. 창 너머로 가느다랗게 빗소리가 들린다. 늦잠과 간단한 아침식사, 그리고 하림의 노래. 2. 무릎팍 도사 공지영 편을 봤다. 이십대 초반쯤 와, 하고 좋아했던 그녀가 시들하게 느껴진 게 무엇 때문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난다. 최근엔 트위터 팔로우하면서 어떤 말들에 공감을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어이없게, 그녀가 사형수들을 만난 스토리에 울컥, 했다. 죽을 날을 앞둔 그들이 사소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에 변하더라는 이야기 듣다 갑자기 눈물이. 가치롭다 여겨지는 일을 하지 않아도, 거창하거나 유명하거나 빛나는 삶을 살지 않아도, 심지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그냥 포기하거나 내버려둘 삶은 없구나. 3. 예전에도 잘 우는 편이었지만, 요즘은 좀 눈물샘이 고장난 듯. 아무데서나 자꾸 ..
1. 오전 열시가 채 안된 아침, 우체국에 가서 편지들을 부치고, 서점에서 한 시간 쯤 이책저책 기웃댔다. 의 새 양장본은 그럴 듯 해보이지만 별로 안이뻤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본 은 마음을 충만하게 만들어줬다. '빈집' 바로 다음 시가 '먼지투성이의 푸른종이'라는 걸 발견, 한 단어씩 천천히 읽어내려 가는 게 좋아서 한참 시집을 붙잡고 서 있었다. 여성학 책장으로 이동해서는 몇 권의 책 목차를 쉬리릭 빠르게 검토하고 몇몇은 메모메모. 교육학 책장에서는 사토 마나부와 조한혜정 선생님 책을 만지작만지작 했다. 최근에 번역된 교육사회학 논문집에서 딜라보어가 쓴 몇 단락을 좀 읽다가, 엉뚱하게도 를 즉흥 구입. 논문도 논문이지만, 수업의 아이디어를 던져주는 텍스트들을 지금 필요로 하는구나. 이른 아침 서점..
첫 인도여행 삼주 내내 나는 무척 불편했다. 더럽고 공해 가득한 도시에서 '견뎠던' 초반 열흘도 그랬지만,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았던 시골 관광지에서의 시간도 불편했다. 여행 내내 마음과 몸이 다 불편했다. 두번째 인도여행 땐 몸 불편한 건 잘 모르겠고 마음만 좀 불편했다. 거기서 참 간만에 활짝 웃기도 하고 뭔가 치유한 부분도 있지만, 쨌든 불편하긴 했다. 오늘,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 품었던 의문 "세상 모든 존재가 다 같이 행복해지는 길을 없는가?" 하는 부분을 공부하면서, 내 불편함의 실체를 알겠다. 불행해보이는 사람들, 가난하고 더럽고 구걸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마음, 그들의 존재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가득했구나. 그들의 불행이 진짜 불행인가 의심해보지 않았고, 불행인 것으로 여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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