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깜악귀,라는 학내 밴드가 있었는데, 그들의 '빈집'이라는 곡, 진짜 죽인다. 기형도의 '빈집'에 곡을 붙인 건데, 심지어 시보다 더 좋다는 느낌이 들 정도. 원작 소설보다 영화나 드라마가 더 좋기는 어려운 것처럼, 시에 붙인 노래도 마찬가지인데, 요건 완전 예외. 볼륨을 크게 올려놓고 이 노래를 들으면 사랑을 잃는다는 것, 그 마음이 아프면서도 서늘해진다. 좋다. 2. 조금 외롭다고 느낀다. 혼자 연구실에 앉아있거나 추운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누군가 따뜻하고 다정하게 내게 말을 걸어줬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의 뒤를 잇는 건, 역시 해야할 일들의 리스트나 냉장고 속에 뭐 먹을 것이 없나, 같은 것들이다. 생각해보면, 외로움이나 그리움이라는 감정도 그렇게 오래 나에게 머무는 ..
1. 오늘은 수업이 있는 화요일. 학생들이 뭔가를 읽는 동안 나는, 햇살이 길게 교실 바닥에 들어와 앉아있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간이 아주 천천히 지나가는 그 순간의 평화. 교실은 많은 것이 생동하기도 하고, 많은 것을 가라앉히기도 하는 요술 공간. 거기서 빛나는 문장들과 보물같은 단어들, 그리고 아름다운 우주들을 만난다. 2. 세시간, 길지 않은 시간인데, 교실을 나서면 곧장 피로가 몰려온다. 저녁을 먹으며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시켜 왔더니 연구실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 앉아, 가시지 않은 피로감을 어깨에 얹고 어떤 인터뷰이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남편은 어떤 분이셨어요? 하니까, "음 (침묵 6초), 근까 (침묵 3초)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은 사람이에요" 하는데 빵 터졌..
1. 흐린 날엔 음악이 더 잘 '느껴진다.' 흐린 봄날, 아침부터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다. 들을 때마다 좋다. 변태처럼 반복, 또 반복. 가만 보니 난 좀, 촌스럽게도, 드라마틱한 곡을 좋아하는 것 같다. 심각함과 가벼움, 어두움과 밝음이 왔다갔다 적절히 잘 배합된. 자자자장! 하면서 너무 장중해도 싫고, 짜자잔~ 너무 화려해도 싫다. 그래서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이 좋다. 다른 악장들은 지나치게 장중, 심각하거든. 사람도 그런가, 싶다. 지나치게 확신에 차있거나, 심하게 머뭇거리거나 대책없이 화사하면 매력을 못느끼겠다. 분명 아주 스마트한 사람인데, 그럼에도, 이것과 저것을 두고 좀 망설이고, 좀 헷갈려하고, 좀 판단을 유보하는 듯한 사람을 보면 확 끌린다. 그건 아마 나라는 인간이 어떤 순간..
1. 몸이 좀 안좋아서 오전엔 골골. 오후엔 강의계획서 확정을 목표로 내내 붙들고 있었는데 좀전에 겨우 완료했다. ('인터넷 서핑하면서 할일 미루기' 종목이 있다면 금메달 자신있다.) 수업의 방향을 정하고 꼼꼼하게 구체적인 부분들을 디자인한 뒤 예쁘게 편집까지 하고 나니, 새롭게 만날 학생들이 본격 기대되는군. 수업이라는 건, 완벽하게 하려면 한없이 부담스럽지만, 실험하고 연습한다 생각하면 한 학기 내내 노는 기분으로 진행할 수 있는 묘한 것. 실은 논문이나 다른 일들도 비슷하겠지.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이 내 공부와 삶에 자극을 주고 나라는 인간을 성장시켜주는 계기가 된다는 게 좋다. 이렇게 보면, 참 감사한 일이다, 가르칠 수 있다는 것. 2. 나의 이십대를 함께 보낸 (몇 안되는) 소중한 인연 중 한..
1. 들뜬 기운이 가득하던 어제, 개강날, 띠동갑 녀석이랑 점심을 같이 먹었다. 지난 가을 쯤 알게 된 이 녀석은 제대한지 한 학기 지난 복학생이다. 아, 신입생도 아니고 복학생이랑 띠동갑이라니! 어느새 내 나이가 이렇게 되었구나 하는 한탄의 마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는데, 저절로 시대와 경험의 차이, 그리고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녀석과 비슷한 점이 의외로 많이 있다. 이 동질감이 만나서 밥을 먹고 이야기 나누게 했겠지. 차이 속의 동질감, 동질감 속의 차이, 이런 게 관계를 풍요롭고 재미있게 하는 법. 그래서 이번 학기가 흥미진진 기다려진다. 흐흐. 2.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갑자기 좋아져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듣고 있음. 예전엔 피아노나 첼로 독주곡이 좋았다..
두 차례 인터뷰를 하다보면, 두번째 인터뷰에서 목소리도 느낌도 달라진다. 난생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기 인생 얘기를 풀어내고 나서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갖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인터뷰이들은 두번째 만남에서 경계가 풀리고 목소리에 신이 나는 것 같다. 어제 한 두번째 인터뷰 녹음 파일을 오늘 다시 듣고 있는데, 까르르 웃으며 인생의 이 골목 저 골목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듣고있는 나도 웃게된다. 어쩌면 아주 내밀한 부분까지 알게 되어버리는 이 생애사 인터뷰를 하면서, 참 특별한 만남들이 생겨난다. 친구도 선배도 선생님도 아닌 여자들이지만 나도 모르게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들 인생의 무게 때문에 가끔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지금 살아서 그동안 살아낸 삶을 이야기하는 그들은 아름답다. 논문..
1. 지난 밤엔 간만에 늦게까지 깨어있었어요. 자정 쯤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잘안되더라구요. 한참 뒤척이다 벌떡 일어나 작은방에 책 들고 가서 좀 읽었어요. 영문판을 좀 보다가, 간만에 박완서가 읽고싶어져서 을 다시 봤습니다. '시'와 '사치'로 전쟁을 견디고, 서로에 대한 몰두의 힘으로 궁벽을 견뎠던 젊은 연인의 시간들. 오십년이나 지난 뒤 그걸 다시 돌아보는 노인의 시선이 서늘하고도 뜨거웠어요. 박완서 특유의 냉정한 성찰의 말들은 읽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더군요. 그래도 사랑이야기라 그런지 마음이 노골노골해져서, 이내 긴장이 풀리고 졸음도 밀려왔답니다. 2. 어제 저녁엔 용산참사 2주기 추모 문화제에 갔어요. 서울역 광장에 모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고 날씨는 무지 추웠습니다. 참사가 일어..
1. 연구실을 같이 쓰는 사람 중에, 유난히 소음을 내는 이가 하나 있다. 신발도 질질질질 끌고 다니고 문은 꽝꽝, 책상에 책을 놓을 때도 탁탁, 공부가 잘 안될 땐, 노트북 자판이 튀어나올 듯 쎄게 타이핑 한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 것 같은데 유독 나는 이 사람 소리가 그렇게 거슬린다. 2. 매일매일 학교에 나와서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 습관처럼 하고 있지만. 어떤 날은 공부가 너무 잘돼서 곧장 논문을 완성해버릴 기세였다가, 또 어떤 날은 '논문을 과연 써야만 하는가?'에 대해 심하게 고민한다. 이렇게 왔다갔다 하면서 뭔가 축적이 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3. 토론토 생활을 마무리했던 5월 초순 이후로 규칙적인 운동을 안하고 있다. 여행 다니느라 어영부영 미루기도 했고, 갑자기 돌아온 서울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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