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 생활 백십구일째 _ 2010년 3월 17일 수요일 간밤에, 맥주 마시고 좀 놀았다. 펍 가서 마시면 둘이서 보통 30-40불 하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잘 안가는데, 어젠, 저녁 늦게 도서관에서 나오면서 '안주없이 딱 한잔씩만'을 외치며 펍에 들어갔는데, 마시다보니 기분 업돼서, 게다가 윙 가격이 반값인 요일이라서... 안주도 시키고 피쳐도 한 개 더 시키고... 뭐, 좀 취할 때까지 마셨다. 전차타러 가는 길 담배도 한 대씩 피고, 간만에 비틀비틀 히히덕, 자정 다돼서 귀가. 술깨고 자야한다며 책을 펴들었는데 나도 모르는 새 잠이 든 것 같다. 아침에, 늦잠 자고 일어났는데도 머리는 지끈, 속은 울렁 거린다. 여기 와서 거의 처음, 긴장 풀고 술마시며 놀았던 간밤은 좋았는데, 아침 숙취 만땅 상..
토론토 생활 백십팔일째 _ 2010년 3월 16일 화요일 _ 화창한 아침, 메일함을 열어보니 반가운 편지들이 몇 통. 서울 있을 때, 평소 한가하다가도 약속이 생길라치면 막 몰려서 잡히는 것마냥 여기서 받아보는 반가운 소식들도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만 같다. (물론 그 소식들은 대부분 나의 씨스타들로부터 온 것들.ㅎ) 그 편지들이 반가운 것은, 행간에 그녀들의 삶의 순간들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글자와 글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를 탐험하는 동안 나는 여기가 아니라 '거기' 그녀들의 곁에 간다. 여기와 거기,라는 공간상의 차이가 허물어지고, 순간이동이 일어나는 그 때, 이런 게 '소통', 혹은 '교류'가 아닐까. _ 봄날씨가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만들길래, 점심 먹고는 나들이길 나섰다. sea라고 불리는 온..
토론토 생활 백십칠일째 _ 2010년 3월 15일 월요일 주말 내내 흐리고 봄비 오시더니, 오늘은 북쪽 하늘 끝에서부터 개고 있다. 뉴욕 다녀와 발표 준비에 다다다다 달리다가, 주말엔 잠시 쉬었고, 오늘 다시 '업무' 시작. 밀린 메일들이며, 작지만 신경써서 처리해야할 일들, 뭐 그런 것들을 하느라 오후가 휘릭 지나간다. 그래도 해가 길어져서 창밖은 내내 밝다. 지금은 계절이 바뀌는 기간, 두근대며 '봄'을 기다리다가, 알아챈다, '두번째' 겨울을 잘 넘겼구나, 식구들, 친구들, 그리고 옆에 있는 양 덕분이다, 해본다. 혼자 이렇게 남아있는 거,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었지만, 요즘은 그래도, 살아있어서 좋다, 지구의 어느 한 점 위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고, 내 존재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
토론토 생활 백십이일째 _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간만에 요가 교실 갔다. 강사 선생님이 하는 영어가 너무 잘 들린다. 다른 건 몰라도, 요가, 필라테스 선생님들이 말하는 영어는 진짜 잘 들린다(처음엔 이것도 잘 안들렸지만).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주고, 반복해서 말해주니까 영어에 익숙하지 않는 나 같은 강습생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거다. 어제 점심 땐,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건너편에 앉은 똘망하게 생긴 동양 여자애가 백인들이랑 연구와 관련된 토론을 '영어로' 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순간 드는 생각은, 아 부럽다, 나도 쟤처럼 저렇게 자유롭게 학문적인 논의를 영어로 해보고 싶다, 하는 거였다. 영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 그걸 유창하게 하는 걸 동경하는 건 영어가 가진 특권을 내면화한 ..
토론토 생활 백십일일째 _ 2010년 3월 9일 화요일 발표 자료에 넣을 1970년대 여대생 이미지들, 전혜린. 양희은씨 70년대 땐 이렇게 괜찮은 이미지였구나. 조금만 더 멋지면 좋겠다, 지금도. 전혜린의 일생을 적은 짧은 글을 인터넷에서 읽다가 잠깐 눈물이 나올 뻔 했네... 저 여자들은 누구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어했을까. 그리고 무엇을 쳐다보고 있었을까. 저 여자들의 시선이 머문 곳, 그 어딘가에 내가 있을 것도 같다는 느낌. 오늘은 아침기도, 영어작문.
토론토 생활 백십일째 _ 2010년 3월 8일 월요일 _ 날씨가 너무 좋다, 오늘. 맑고 푸른 하늘과 산들거리는 바람, 공기도 그렇게 차갑지 않아서 거리에 사람들 걸음걸이가 여유롭다. 도서관 큰 창 밖으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게 보인다. 봄이 그 머리카락들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것 같다. _ 오전엔 여독때문인지 컨디션이 너무 안좋았다. 스트레칭을 하고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나니 좀 가벼워진다. 오후가 돼서야 도서관에 도착하니 자리가 없다. 노트북 전원을 꽂을 수 있는 자리를 찾으려니 더 어렵다. 빙빙 돌다가, 흑인 남자 둘이 앉아있는 책상에 빈자리가 있길래, 게다가 거기에 전원을 꽂을 수 있길래 와서 앉으니 내 맞은편 남자의 얼굴에 놀라는 듯한 표정이 새겨진다. 십여분이 안돼서 ..
토론토 생활 백구일째 _ 2010년 3월 7일 일요일 돌아왔다. 이박삼일 예정으로 떠나선 칠박팔일만에 돌아왔다. 밤새 달려온 버스가 버팔로에 정차했을 때, 선잠을 자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 이제 집에 다왔네... 그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은 남부순환도로 낙성대 사거리 근처. 새벽녘의 그 거리는 차고 한적했다. 저 길을 따라 가면 봉천동 내 집에 다다른다, 뜨끈하게 보일러 켜 놓고 한 숨 더 자야지, 하다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지금 귀가 중인 '집'은 토론토의 내 방이구나, 하고. 열시간만에 버스는 토론토에 도착, 아침 9시부터 다니는 지하철 첫차를 기다리느라 다운타운의 브런치 식당에 가서 아침 식사. 사람 버글 거리는 대도시 뉴욕에서 여기 돌아오니 한산하고 조용하고 작고 익숙하다. 여기도 집이구..
토론토 생활 백일째 _ 2010년 2월 26일 금요일 눈이 많이 내린다. 서울은 벌써 봄이 온 것 같다,고들 하던데, 여긴 아직도 겨울, 이라고 창밖에 펑펑 내리시는 눈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로 여기 온지 백일. 감개무량, 이랄까. 암튼 마냥 즐겁고 재미있지만은 않았던 시간들. 그래서 나는 여기 와서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고 늘 조금씩 걷고 뛰고, 때로 주저앉기도 했지만, 또 일어나 어딘가 '가고 있는'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경험하는 '지금-여기'에서의 온갖 생각들과 느낌들, 감정들이 결국은, 내가 오랫동안 머물렀고 존재했던 '거기'에서의 나를 돌이켜보고 설명하는 것으로 귀결되더라는 것. 여기서 뭔가 기쁘거나 괴롭거나 슬프거나 화가 날 때, 그런 감정들이 불러일으키는 것들은 결국..
토론토 생활 구십구일째 _ 2010년 2월 25일 목요일 오늘 새벽에, 한국 시각으론 어제 오후에 남동생의 딸이 태어났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동생의 목소리. 너무 기쁜데, 들뜨지는 않은, 묵직한 감동이 그의 목소리에 담겨있다. "누나, 너무 감동적이다. 아기는 다 작아, 얼굴도 손도..." 소식을 듣는 나도 참 기쁜데 들뜨지 않고 대답한다, "응, 잘 했네, 고맙다." 전화 끊고 다시 누웠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누군가 태어난다는 것, 지금 이순간에도 누군가 태어나고 있지만, 그게 어떤 의민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 작은 존재가 우리에게 와서, 이제 많은 일들이 일어나겠지. 기쁨과 슬픔과 원망과 고통이 그 아이를 중심으로 수없이 많이 반복될 거야. 그래도 감사하다, 내 동생을 '아버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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