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처음 만나 몇 달을 못보다가 최근 격주에 한 번씩 만나는 어떤 분과의 첫 점심.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만나 주고받는 이야기들 사이의 어색함. 그래도 좋았다. 드문드문 대화의 조각들이 자꾸 생각나는. 미학을 전공하는 그 분께 문득, 고등학교 때 민화를 무지 좋아했던 이야기를 하다가 앙리 루소 이야기까지 나왔다. 민화의 그 선명하고 강한 색감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오르세에서 루소의 작품 앞에 섰을 때, 난 좀 놀라서 한참을 그 주변을 서성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선뜻 발을 떼서 다른 작품으로 가지 못했다. 그 분 왈, 루소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독특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거란다. 찾아봤더니 마흔 아홉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네. 그의 그림과 별개..
7~8년 전 쯤이었나. 어느 총여학생회에서 주최하는 주점에 갔다가, 그 시끄러운 술집 안 스크린에서 영화 을 처음 봤다. 나중에 두어 번 더 봤는데, 볼 때마다 노래가, 주인공이, 스토리가 넘넘 좋아서 헬렐레~ 했었다. 뮤지컬 헤드윅은 본 적 없는데, 영화가 너무 좋아 오히려 피하게 되는. 그런데 텐아 기사를 보니, 김재욱의 헤드윅 보고싶어졌다. 이런 매력적인 사람 같으니. 김재욱의 헤드윅, "after 재심 to do list" 의 1번으로 올라감.ㅋ http://10.asiae.co.kr/Articles/new_view.htm?sec=news13&a_id=2011053122404521148
오늘 전공 세미나팀 ER (Education and Reality. 작명은 내가 했음.ㅋ)에서 이 영화를 '또' 봤다. 오덕하게도 이미 대여섯 번 봤는데도, '1995년 베를린' 하고 첫 장면의 자막이 뜨는데 가슴이 두근, 하더라. 이 영화는 수업 교재이기도 하다. 이번 학기에도 같이 볼 예정. 지난 겨울학기(2010-11학년도) 마지막 수업은 영화에 대한 학생들의 분석을 발표하는 것으로 진행됐는데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주인공 한나를 '생명윤리와 성윤리 의식이 없는 여자'라고 여겨서 난 좀 놀랐다. 한나는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15세 남자 아이와 섹스를 하고 많은 유태인들을 학살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한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윤리와 성윤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연구실 책꽂이에 오랫동안 있었던 문학동네 이천구년 여름호를 들춰보다가, 김애란의 단편 를 읽고, 하루를 시작. 언제나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온다는, 그것도 상처를 받은 후에서야. 나는 엉거주춤 목례한 뒤 그와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목적지는 없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잔디밭으로 돌아가다 몇 발짝 안 가, 돌아서며 한 마디 했다. "고개 좀 들고 다녀라, 이 녀석아."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훗날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어냐고 물어왔을 때,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이라고 대답한 것은.(279) 나는 선배에게 내 모습을 보이는 게 챙피해 머리를 수그려다. 선배는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였다. 얼마 후, 물을 마시려 시선을 돌리는 순간, 선배가 들고 있는 도화지의 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 - 고개 ..
사랑을 믿는다는 해괴한 경험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퇴치하거나 예방할 수 없는, 문이 벌컥 열리듯 밖에서 열리는 종류의 체험이니까. 두 손 놓고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니까.(13) "보잘것 없는 것들이 상황을 바꿔놓거든. 거의 뒤집어놓는다고도 할 수 있지."(22) 나는 그녀가 낯선 여자들과 마주 앉아 있는 동안 그녀 내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그녀 또한 그것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게 무엇이든 어디 보자 하고 덤벼들면 보잘 것없는 것이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를 바꿔놓았다는 것은 분명했다.(28)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
"직업을 심각하게 대해야지, 자기 자신을 심각하게 대하지 마세요. 이 우주에서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조금일 뿐입니다. 늘 거울이나 들여다보면서 머리에 참치기름을 충분히 발랐는지, 이런 것들이나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예술에서든 인생에서든 자기 느낌에 충분히 확신 선다면 그걸로 된 겁니다. 증명할 건 하나도 없어요. 나는 그냥 나이면 그만입니다." - (앤드루 저커먼, 샘터사, 2009) 중 클린트 이스트우드 인터뷰에서,
설거지 투어의 와중, 틈틈히 읽었다. hard-boiled한 내 삶에 온 hard luck. 손으론 수세미로 그릇을 닦고 머리론 이 책의 구절들과 내 논문의 어떤 구절들을 번갈아 생각했다. 정신적인 것들이 때로 지금-여기의 물질적인 팍팍함에서부터 나를 구해내는구나. 새로운 사람을 좋아할 수 있게 됐다는 건, 한번 뿐인 그 가을이 이미 지나가버렸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바나나의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길모퉁이의 아름다운 음악처럼, 이렇게 종종 맞딱뜨리게 되는 건 우연인지, 뭔지. "사카이씨, 애인 있어요?" 나는 물었다. "지금은 딱히. 친구 정도는 있지만." 그는 말했다. "언젠가 또 이렇게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말했다. "만날 수 있겠지, 그리 오래지 않아서." "지금은 ..
재작년 가을, 박완서 선생님이 학교에 강연을 오신 적이 있다. 대형강의동을 가득 메운 사람들 틈을 뚫고 들어가 선생님이 잘 보이는 앞쪽 계단에 앉아 강연을 들었다. 그 날, 가방에 넣어간, 에 싸인을 받고,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선생님, 저요, 선생님 소설 읽으면서 자랐습니다, 하는데 그냥 씨익, 웃으시던 표정이 기억난다. 장편 한편 정도는 더 쓰실 줄 알았다. 이렇게 떠나실 거라 생각을 못해서, 허전하고 슬프다. 공교롭게도 선생님의 부음을 듣기 전 날 을 다시 읽었다. 간만에 잠이 쉬 오지 않던 그 밤, 뭔가 답을 찾고 싶어 책장을 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강연 때 선생님이 그러셨다. 수치와 열등감, 부끄러움이 당신 문학의 밑바탕이라고. 그걸 소설을 통해 직시하기 때문에 자기고발과 반성이 가능한 거라..
예전 블로그를 보니 이 영화를 2007년에 보고 리뷰를 올렸더라. 장면 하나하나가 참 예뻤던 애니메이션. 음악도 좋았고. 지난 토요일 저녁, ㅇㄲ님이 페북에 올려둔 이 영화 ost를 보고는, 하드 디스크를 뒤져봤더니 2화만 남아있었다. 파도 타는 장면은 다시 봐도 너무 좋았다. 봄과 여름 내내 매일 바닷가에 나가 파도타기를 연습하던 스미다가 가을 어느날 파도 위에 서있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런데도 여전히 진로는 막막하고 짝사랑을 고백하기엔 그 사람이 너무 멀다. 이런 정해지지 않음, 해결되지 않음의 상태가, 마음에 남는다. 뒤따라 걸어가며 옷깃을 잡아당기던 저 손가락들이 애처로워도 시간은 흐르고 청춘은 가고 마음도 일어났다 사그라들기 마련임을 알겠다. 그 과정들 자체가, 마치 해질녘의 들판길처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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