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에서 작년에 갔던 윤건차 선생님 콜로키엄 유인물을 발견. 기억도 못하고 있었다. 그날 적은 메모며 밑줄 그은 부분이 모두 생소하고 새롭다. 그날 고민했던 것들, 여기에다 옮겨두고 싶어서, 몇 자. ------------------------------------------------------------------------------------- 조선을 싫어해 일본에 동경해 일본에 버려져 조선을 발견한다 또 조선에 버려져 일본과 조선의 사이에서 '자이니찌'를 자각한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흔들려 움직이는 진자 - 윤건차, [진자] 현시점에서 "재일성(在日性)"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저는 그 핵심은 민족이라거나 국가, 조국이나 고향, 전통, 문화라는 것보다는 오히려 "촐신" 내지 "내력(來歷)"의 ..
1장 흑인과 언어 언어란 절대적으로 타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3). 앙띨레스에 사는 흑인들은 불어 구사 능력에 따라 백인화의 정도를 평가받는다(24). 언어를 정복하게 되면 형언 불가능한 힘을 선사받게 된다(25). 사실 흑인만의 문제란 없다. 혹여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우연적이기는 하지만 백인과 관련되어 있다(39). 정작 흑인을 분노케 하는 것은 이런 의도나 의지의 부재, 관심의 결핍, 무관심, 흑인들을 곧이곧대로 재단하고, 가두고, 야만인 취급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태도 그것이다(42). 흑인은 착하고 말 잘 듣는 검둥이로만 여겨질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검둥이들을 무작정 교육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원형, 즉 노예의 탈을 벗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고등학교 후배들이 내가 다니는 대학에 '견학'을 왔다. 요즘은 대학마다 캠퍼스 투어니, 학교 홍보니 해서 프로그램에 잘 되어있다. 오늘도 대학 3~4학년 쯤 됐을까. 학교 홍보 동아리에서 나왔다는 학부생들이 고등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입시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 '나만의 공부법'을 안내해주더군. 맨 뒷자리에 앉아 고등학생들의 뒷통수들을 보는데, 얘네들의 반짝이는 눈빛이 뒤에서도 보이는 것만 같다. 전공 후배들과 하는 세미나의 이번 주 독서자료는 이다. 반 정도 읽다가 중단했던 걸 이참에 마저 보자며 주말 내내 읽는데, 양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박사학위 따서 뭐할려고 이러고 있냐. 적어도 철거민 처럼 비참해지지는 않으려고 이렇게 애쓰며 공부하는 거겠지?" 비법같은 공부법을 개발하고 스스로를 연마하여..
(지난주에 써서 올렸고, 오늘(8/10) 조금 덧붙였음.) 너무 예쁜 모녀가 있다. 그들이 애정의 눈길을 주고받을 때, 두 손을 꼭 잡고 길을 걸을 때, 흐뭇한 웃음이 나올 정도로 이쁘다. 그런데 그녀들의 삶은 평탄하지 않다. 끝없는 죽음의 위협 속에 놓인다. 그것은 그녀들이 인간이 아닌 '여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그녀들이 가부장제-신분제 사회에서 여자이자 하층계급이기 때문. 결국 딸은 양반 가부장에게 죽음을 당하고 어미는 복수를 시작했다. 여우이자 하층계급이자 여자로서 가부장제 안/밖의 존재인 그녀가 가부장(들)과 그(들)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다른 그녀들에게 어떤 복수를 할지, 그것이 얼마나 전복적일지 기대된다. 그녀들이 죽음의 위협에 처하는 장면마다, 인신매매와 연쇄살인,..
영화나 한 편 볼까, 하고 시작했는데, 옴짝달싹을 못하겠더라. 만큼이나 끔찍하고 무거운 이야기. 그런데, 이건 '한국의 현재'에 관한 이야기잖아, 그러니 마음이 더 드글드글 해진다. 여자를 팔아먹고 사는 남자들, 여자를 fuck하는 대신 죽이고 토막내며 사는 남자들, 전화 한 통에, 돈 몇 푼에 여자를 사서 즐기며 사는 남자들, 이 남자들이, 의도의 여부를 떠나, 한 사람씩, 차례로, 죽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 그리고 그걸 그저 쳐다보고 있는 나(와 같은 많은, 오직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이를 닦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너무 무서운' 직업을 가진 여자들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괴롭지만, 이렇게 이 기분을 그냥 지나가버리고 싶지 않다. 범죄는..
어제,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 다 씻고 침대에 누웠다가, 노트북 안에 있는 가 떠올라서 잠깐만 보다 자자, 하고 파일을 열었는데. 피곤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노트북 앞에 딱 붙어 않아 봤다. ㄹ의 표현대로, 마음이 '드글드글' 하더라. 특히 엔딩이 인상적이었음. 에서 반하도록 이쁜 미친년 역할을 맡았던 서우는 이 영화에선 안개처럼 모호해서 불편하고 어리지만 무서운, 다른 의미의 미친 여자가 돼있었다. 전작 처럼, 나는 이 영화의 여백과 공간이 좋았는데, 정한석 같은 평론가는 그게 불편하고 싫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좋음과 싫음의 차이는 박찬옥의 영화에서 그려지는 여성과 남성의 캐릭터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사실 나는 혼자 괜히 커피프린스 이후 이선균을 좀 미워했는데, (쿨해보이는 ..
그 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 냇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 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 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 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
아이들은 취약하다. 돌보지 않는 아이들, 버려진 아이들의 현실은 그래서 비참하다. 클로즈업으로 일관되는 종반 직전까지의 앵글이 불편했다. 그 취약하고 비참한 존재들의 현실을 낱낱이 보여주는 것 같아서. 아이들의 눈, 입, 코를 쓸어내곤 하는 손 버릇. 불안하고 배 고프고 보살핌도 결핍된 아이들은 쉽게 울지도 못한다. 그래서 벌을 서던 진이가 엉엉 울 때, 오히려 마음이 시원해진다. 사실 나는 불꺼진 방안에서 쉽게 잠들지 못하는 진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몇 장면에서 그 나이 또래의 내가 오버랩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장면에서 흐드득 눈물을 떨어트렸을 텐데, 왠일인지 안그랬다, 그저 한숨만 쉬었을 뿐. 그렇게 아이들을 맡겨두고 어딘가에서 또다른 불안과 죄책감을 짐지고 있었을 그 아이들의 엄마가 함께 떠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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