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동네와 논밭이 있는 동네. 올겨울 새로이 발견한 산책길엔 낡고 오래 된 것들이 많이 있다. 이제는 동물도 사람도 살지 않는 목장, 더이상 누구도 어떤 버스도 오지 않는 버스 정류장,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는 작은 차도... 오래 된 것들에 깃든 낡은 기운에는 쓸쓸함과 함께 나름의 멋이 있다. 나는 그 낡은 멋과 빛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빛나는 장면들에 눈길을 주며 오래오래 걸었다. 다리는 노곤하게 피로해지고 머릿 속은 개운하게 맑아지는 시간. 이런 산책의 순간들이 참 좋다. 어쩌면 제도 안에 자리잡고 있는 내 삶을 안정이나 안전이라는 키워드로만 읽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을 하면 이렇게 새롭고 이상한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신기하게도.
영화 69세의 임선애 감독은 주인공 효정이 사건 해결을 포기하지 않은 건 사랑의 힘이라고 했다. 물론 그 사랑은 동인의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연락을 끊은 효정을 찾아와 뭐든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그의 마음이 그녀에게 힘을 준건 분명하다. 그런데 결국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효정이 한 걸음 나아갈 때 했던 행동은 동인이 쓴 고발장을 자기 문장으로 다시 써내려가는 것이었다. 동인의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그 사건을 겪은 건 효정이고, 해결또한 자신의 몫임을 이 여자는 명백하게 알고 있다. 이 영화가 가진 수많은 미덕 중에서도 나는 이 부분이 가장 좋았다. 타인의 깊고 충분한 사랑이 나라는 존재를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내 삶을 밀고나가는 건 결국 나 자신이다. 누구도 대신 할 수 없고, 대신 한다 해도 그..
성탄 연휴 내내 두통이 잔잔히 있었다. 6과목 채점을 끝내야했고 냉장고 속은 빈약했고 성탄을 맞아 뭔가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채점은 거의 다 했고 특별한 시간은 별로 못 보냈고 외식만 잔뜩 해서 속이 별로 안좋았다. 간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는데 맘에 드는 사진도 한 장 못찍었네. 무엇보다, 해야하는 내 일(채점)과 가족 안 노동(식사 준비, 특별한 연휴 보내기)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남편이라면 이런 상황 어떻게 지냈을까. 아마 하루 이틀쯤 집을 나가 일을 우선 끝냈을 거 같다. 나는 내내 집에 붙어있으면서 집안 일과 채점 노동을 찔끔찔끔, 그것도 남편 눈치를 보며 했던 거 같다. 남편은 무슨 이유인지 연휴 이틀째부터 기분이 안좋았는데 그것 때문에 아이도 안절부절, 둘의 모습에 나..
나는 돈을 잘 못쓰는 사람이다. 비싼 거, 좋은 거 살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쓸 만한 물건은 오래 되어도 버리지 않고 쓰고, 디자인을 위해 쓰던 물건을 바꾸는 일은 거의 없다. 아이를 낳은 후엔 아이 옷이나 물건에도 이런 소비 습관이 적용되었다. 금새 자라기 때문에 고급스러운 옷, 비싼 옷은 사입히는 일이 드물었다. 물려받은 옷만으로도 이쁘다 하며 입힌 시절도 꽤 길다. 그런데 아이가 크니까 그게 잘 안될 때가 있다. 이젠 제법 유행도 따지고 디자인이나 스타일 면에서 다른 아이들 옷과 비교하기도 한다. 아이 옷 중에는 겨울 외투가 제일 비싸다. 방한용 패딩 점퍼는 이삽십 만원 가량도 한다. 그동안은 저가 브랜드 아동복 세일 때 십만원 미만으로 외투를 사입혔다. 재작년에 넉넉한 사이즈로 샀던 외투가 올..
아직도 해야할 일들이 주루룩 남아있지만 어제 종강을 했다. 한 학기동안 학생들이 얼마나 변화했는지, 뭘 배우고 어떤 연습을 했는지 이야기해주고 고마운 마음, 대견한 마음을 전했다. 학생들의 수업 소감도 들었다. 이번 학기도 배우고 가르치며 괴로웠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마무리하는 순간은 좋았다. 학교에 와서 다섯 번째 학기, 전체로 치면 서른번째 학기 정도 될까. 그동안의 가르치는 몸이 하나의 매듭을 짓는 일에도 익숙해져있다는 걸 느낀다. 그런 나의 몸에게도 수고했다, 고맙다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 밤에 깨서 이렇게 글을 남긴다. 학생들은 내가 의도한 대로 변하지 않는다. 내가 준 틀과 경계를 넘나들며 배운다. 나의 프레임이 기준이 되지만 그걸 언제나 초과하고 흔드는 것은 학생들이다. 나는 결과를 알 수 없는..
제가 생각이라는 걸 정말 하고있다고 여겨지는 수업인 것 같아요. 제 사고의 범위를 매번 확장할 수 있게 되는 유익한 수업과 토론의 장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업 올 때마다 너무 즐겁고 기대돼요! 이렇게 많은 사회의 문제를 다루면서 다같이 의견을 나누는 수업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그리고 암기식, 강의식 수업보다 훨씬 가치 있는 수업임을 알고 있어서 이 수업이 소중했습니다. 한 학기동안 많은 질문을 해주셨는데, 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말문이 막히는 질문들이 많아서 답하기 힘들었습니다. 정말 많이 부족한 학생이었는데 교육사회학 강의를 통해 조금이나마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우리과 학생들이 이렇게 열심히 발표하고 질문하는 것을 처음 봤다. 그래서 이번 주제가 우리과 학생들도 관..
엄마 기일을 보내고 난 아침. 어느새 15년이 흘렀다. 나는 최근에서야 엄마 생전에 나에게 준 심리적 고통을 꺼내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고나서야 15년 전 세상을 떠난 엄마와의 인연을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엄마의 여러 면을 돌아보는 것은 엄마와의 관계또한 여러 면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엄마는 나에게 말로 할 수 없는 사랑을 준 사람이면서 동시에 나에게 괴로움과 부담감을 오랜 시간 안겨준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엄마에게는 그것이 최선의 삶의 방편이었을 거다. 여전히 엄마가 보고싶다. 세상 누구도 나에게 줄 수 없는 평안과 따뜻함이 그립다. 엄마의 쾌활함과 천진함이 그립다. 말로는 표현 못하는 유대와 연결감이 엄마와 나 사이에 있다. 그렇지만 엄마로 인해 내게 주어졌던 부담과 고통도..
오랫만에 주말 연구실 출근을 했는데 긴 기간 비워뒀던 공동연구실에 쥐가 살고 있는 듯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마주칠까) 무섭고 (세균이 득실댈 거라 추정되는 쥐의 흔적이) 더럽게 느껴졌지만, 써야할 원고는 있는데 작업할 곳이 마땅찮았기 때문에 눌러앉아 서너 시간 혼자 일을 했다. 중간에 점심 먹고 들어오는 길, 연구실 옆 벌판에 가서 꽃을 꺾어와 종이컵에 꽂았다. 쥐가 들락거리는 연구실이지만 예쁜 건 좋은 거니까. 가을 꽃 빛깔과 늦은 오후의 볕이 잘 어울린다. 꽃은 언제나 위안을 준다. 명절 연휴부터 이번 연휴까지 내내, 어쩌면 개강 후 내내, 쉬지 않고 달리기만 했던 걸 원고를 중간쯤 쓰고 일단은 보내고 난 지금에야 알겠다. 숨 차게 뛰는 동안에도 알아채줄 걸.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는 시간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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