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를 생각하면, 시장에서 신선한 것으로 사와서 생으로 먹었던 미더덕과 미역, 밭에서 따다가 쓱쓱 닦아 뚝 분질러 먹었던 가지, 할매네 마루에 있던, 크고 작은, 참 잘자라던 화초들, 늘 입고 계시던 알록달록 꽃무늬 몸뻬, 뽀글뽀글하고 얇았던 할매 머리카락, 손수 만들어주신 상 보자기, 드르륵 드르륵 발로 굴려서 돌리던 재봉틀,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서른 셋에 과부돼서 딸 다섯을 혼자 기른 여자. 그 할매가 나에게 남긴 기억들은 먹는 것, 기르는 것, 입던 것, 만들어 주셧던 것들. 이런 오밀조밀 마음 꽉차게 그득한 것들 뿐이다.
2009 summer @ sky over Paris taken from Moncmarte 덥다, 내가 기억하는 여름은 늘 더웠던 것 같은데, 언제나 새삼스럽다. 어제 저녁엔 이열치열이다, 하면서 저녁에 한 시간쯤, 동네 공원과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탔다. 골목길마다 더운 집안을 견디다 못해 탈출한 사람들로 바글거리는데, 골목길 조차도 바람 한 점 없더라. 방보단 마루가 시원할 것 같아서 잠자리를 옮겼는데도 밤중에 두어번 깨서 타이머 다 돌아간 선풍기를 다시 켜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라디오에선 '지금 온도가 벌써 27돕니다" 한다. 하루의 더위를 다 겪은 듯, 아침부터 지친다. 어제 한낮의 뙤약볕을 내리받으며 연구실에서 학교 식당까지 왕복했다가 일사병 걸릴 뻔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오늘은 아침 먹고 남은 ..
벤쿠버엔 한 삼일쯤 머무를 작정이었다. 이미 한달 가까이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집이 그리웠다. 게다가 도착했던 날만 빼고 내내 흐렸던 벤쿠버에선 뭔가 즐거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비행기 좌석을 구할 수 없었다. 예정과 달리 2주 넘게 그냥 여기 머물러야겠다, 하고 어쩔 수 없이 마음 먹을 땐 벤쿠버에서의 시간이 참 편하고 좋을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아침에 문을 열어 날씨를 확인하고, 벤쿠버에서도 귀한, 맑은 날이면 어딜 나갈까 궁리했다. ㅅㅌ의 친절한 안내와 배려 덕분에 좋은 곳에서 재미있는 시간들을 마음껏 보낼 수 있었다. 벤쿠버는 노숙인과 마약, 성매매와 인종 차별 등 심각한 문제들을 많이 가진 도시이기도 하지만, 넓은 공원과 큰 나무들이 많고, ..
일주일 하고 이틀이 흘렀네요, 쏜살같이, 시간이 지나갑니다. 까먹고 있었던 것들이 막막 기억나고 깨달아지는 순간들입니다. 거기서 내가 기억하곤 했던 서울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면서요. 기억은 언제나 선택적인 것이라 거기선 애써 부정적인 것들은 기억해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덕분에 소음, 습한 날씨, 붐비는 지하철과 버스와 거리, 오염된 공기 같은 것들이 새삼 느껴지기도 하고,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인간 관계들과 예의 차리며 연락해야하는 몇 어른들, 마주쳐도 반갑지 않은 몇 사람들의 리스트가 좌라락 새로 새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건, 사실 나 자신입니다. 내가 이런 걸 싫어했지, 내가 이런 걸 못견뎌하곤 했지, 내가 이런 상황에선 도망치려고 했지, 내가 이런 것에 ..
가끔 학교 연구실에 평소보다 이르게 도착할 때가 있었다. 문은 잠겨있고 복도는 조용하다.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 내 자리로 걸어가는 동안, 간밤에 쌓인 책냄새가 훅, 내 폐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가방을 내 책상에 두고, 창문을 차례대로 열고, 문까지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며 자리에 앉으면,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조용히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만 같았던, 아침 커피. 오늘도 아침 커피를 마신다, 학교 연구실에서 멀리 떨어진 이 곳에서. 커피콩을 갈아서 메이커에 넣고 내린 신선하고 따뜻한 커피. 그 따끈한 온도가 나를 달랜다, 서두르지 말고 하루를 시작해보라고. 바깥 날씨는 개었다 흐렸다를 반복하고 있고, 나는 간만에 써야할 짧은 글이 하나 생겨서 버벅대고 있다. 하루 해가 길어서 저녁이..
여기, 알렉스네 집은 반지하에요. 그래서 아침 볕이 잘 안들어옵니다. 맑은 날에도 그렇고, 오늘처럼 흐린 날엔 더욱 그렇고요. 어젠 피곤한 몸으로 자정 쯤 잠자리에 누웠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오전 열시가 훌쩍 넘었어요. 간만에 열시간을 내리 자고 일어나니 조금 가뿐합니다. 반지하 방에서만 가능한 숙면을 간밤에 누릴 수 있었네요, 기분이 좋아요. 알렉스와 함께 사는 네이튼은 종일 집에서 일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네이튼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커피콩을 갈아서 메이커에 넣고 커피를 내리는 거예요. 신선한 커피향이 부엌과 거실에 퍼지고 있을 즈음, 네이튼이 "커피 한 잔 마실래?"라고 수줍으면서도 친절한 대사를 한 마디 합니다. 지금 바로 그 커피를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음, 커피..
아무데서나 똥을 잘 못싼다. 내가 늘 쓰던 몇 개의 익숙한 화장실이 아니면. 낯선 사람과 함께 있거나 불편한 상황에 있을 땐 더욱 그렇고. 토론토 집을 떠난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베를린-남독일-캐내디언 록키-벤쿠버...까지. 그 동안 변비가 계속 됐다. 낯선 화장실에 익숙해질 즈음 다시 짐싸고 떠나는 걸 반복하면서. 어제 도착한 벤쿠버는 바닷가 작은 도시 답게 참 예쁘다. 그런데 오늘은 흐리다. 화장실 사용이 익숙해질 때까지 여기 머물지도 모르겠다. 봉천동 집 화장실이 무척 그립다. ㅅㅌ이 내어준 안방에서 자고 일어나 창밖을 보니, 반지하 침실 바로 옆에 잔디밭이 있고, 거기 청초한 도라지 꽃들이 피어있다. 긴 여행을 일삼아 다니는 여행자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도라지 꽃 몇 송이가 길 위에서 서성이는..
학교 다닐 때, 사범대 노래패 이름이 '길'이었다. 나는 인문대 노래패 소속이었지만, 우리가 노래도 잘하고 공연도 더 잘했지만, 나는 그 이름이 늘 부러웠다, 길. 뭔가 주장하거나 소리지르지 않고도, 그 과정만으로 아름다울 것 같았던 이름이라 여겼던 걸까. 대학을 졸업하고는 늘, 여행을 가고싶어 안달이었다. 일상의 막막함, 답답함, 숨막힘, 뭔가 아닌 것 같은 그 느낌을 벗어나는 좋은 방법, 그것은 일상을 떠나는 것, 그러나 안전하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방식으로 떠나는 것, 여행이었다. 그 바람 덕분에 여기저기 많이도 다녔다. 적은 돈으로 훌쩍 다녀올 좋은 기회가 종종 생기기도 했고, 시간만 나면 떠나고 싶어서 들썩거리다 보면 기회들이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여행을 떠난지 어느새 육개월이 훌쩍 넘었고,..
나의 '토론토 일기'는 마지막 날 이야기가 안 쓰여진 채로, 마무리되었다. 중간중간에 쓰다말다 펼쳐지지 못한 책장처럼 못다한 이야기들도 있고, 다른 곳에 메모해둔 일기의 조각들도 있지만, 우선은 그냥 여기서 마무리. 다시 들춰보게 될 어느 때에, 이야기들이 다시 시작될 수도, 혹은 그제서야 마무리될 수도 있겠지. 베를린에 온지 일주일쯤 됐다. 코밑에 헤르페스가 생길 만큼 피곤했던 날들이 지나고, 시차도 적응되고, 베를린이라는 도시에 조금 호기심도 생기고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어제 봤던 프리다 칼로 전시였는데, 좀 시간을 두고 느낌과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만큼, 강렬하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가끔,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조만간 갖기 어려운 나만의 '방학'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마음과 ..
정오즈음, 지하철 역을 나오는데 비가 후두둑 내린다. 어제, 그리고 오늘 아침녘 더웠던 공기에 찬 빗물이 그어진다. 이내 흙과 땅에 빗물이 스미는 냄새가 난다, 더운 날,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의 냄새. 그렇구나, 오월이다. 몇 년동안이었을까, 나한테 오월 일일은 늘 '노동자의 날'이다. 거리에 나가 데모꾼들 틈에 앉아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날. 서울에 있었다면, 노동절 집회 장소로 서울 광장을 불허했다는 서울시와 정부에 화를 버럭버럭 내면서 어딘가, 집회가 열리는 장소로 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시간. 그런데, 우연히 알게되었다, 오늘이 여름의 시작이라는 것. 고대 켈트족에겐 오늘이 이런 의미였단다: 여름이 시작된다는 날, 달에게 빌고, 불 위를 건너 뛰어가 다산과 생명의 풍요로움과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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