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장소설이나 성장영화를 좋아한다. [개같은내인생]에서 주인공 남자애는 눈이 다 붓도록 밤새 엉엉 울지만, 아침에 일어나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광장에서 혼자 씨익- 웃는다. 아마 그 애는 그 웃음을 딛고 성장할 것이다, 자랄 것이다. 예전부터 내 일기는 늘 계몽적인 결말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오늘이 아니라 내일, 조금 더 성장할 나를 꿈꾸는 건, 어쩌면 필사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을 절망하거나 다음 순간을 회의적으로 보면서 살아내는 건, 계몽적인 다짐에 비해 더 힘이 들테니깐. 노희경의 드라마가 좋은 건, 상처가 버얼겋게 드러나면서도, 주인공을 비롯한 드라마 속 사람들이 조금씩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면서는 이제껏 몰랐던 게 딱,..
낮에 동네 시장에 갔는데 마침, 진눈깨비 내리고 바람이 세게 분다. 재에 필요한 물건들이랑 과일들을 사고 집으로 돌아와 내일 가져갈 물건들을 챙겨두는데 마음 한구석이 쓸쓸하다. 사십구재를 지내고 나면, 왠지 정말로 영영 이별이라는 생각에 오늘은 종일 가슴이 텅비어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워지고 흐려질 기억의 장면들이 자꾸 떠올라 다른 일이 손에 잘 안잡힌다. 이렇게 쉽지 않은 이 이별을 견디고 나면 봄이 와있었으면 좋겠다. 상을 치르고 집에 돌아온 다음날, 남은 식구들끼리 모여 크고 작은 것들을 의논하면서 사십구재 이야기를 꺼낸 건 나였다. 엄마가 생전에 절에 자주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남을 위해 빌어주기 좋아하고 먼저 간 귀신들의 안위를 늘 걱정하던 사람이었으니깐, 재를 지내주는 것이 엄마의 삶..
고시에 네번째 낙방한 ㅅㅇ이는 요즘 바락바락 돌아다니며 숨쉴 곳을 찾고 있단다. 나는 덜컥 논문계획서 발표 지원서를 냈다, 왠지 좁은곳에 몸을 피하긴 싫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달도 넘게 덮어둔 논문 관련 문서들을 열고 그 세계로 들어가니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한 주 내내, 논문을 왜 쓸까, 가끔 질문하면서도 그냥 기계적으로 매일매일 등교하고 있다, 가끔은 이런 규칙성이 매순간을 살아내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크게, 두 번 술을 마시고, 다음날 토할 게 더이상 없을 때까지 토하면서 더 우울해진 뒤로, 폭음은 않지만, 저녁 즈음이 되면 술생각이 날 때가 있다, 어떨 땐 패쓰,하고, 어떤 날엔 맥주 한두캔을 마신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반복되는 순간들. 이상하게, 사진을 찍는 게 딱 ..
지난 토요일 우연히, 권정생 선생님으로부터 '바람'이라는 이름(실명)을 얻은 한 아이를 만났다. 내 이름도 '바람'이라고 통성명을 하고선 잠시 권 선생님의 유서를 떠올렸다. 어제, 일요일은 종일 혼자 있었다. 몸이 피곤해 집에 누워있다가, 날씨 좋다는 문자를 받고서는 이 닦고 세수하고 대충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한 시간여 나무와 흙, 단풍이 많은 곳을 골라 걷고 걸었다. 빨간 산수유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고, 벚나무 잎파리들 붉게 노랗게 물들어 시들은 잔듸 위에 쌓여있었다. 은행잎의 노랑과 단풍잎의 빨강, 멀리 흐린 파랑의 하늘, 그리고 간간히 멀쩡한 햇볕이 길에 비췄다. 중얼대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조금 울기도 하고 또 웃기도 하면서 걷는 가을길 위에서 늦은 오후가 지나갔다.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고 죽..
비오는 평일 낮, 광화문 스폰지하우스 상영관은 눅눅하고 더운 공기로 가득차있다. 작은 극장, 그 마저도 채워져있지 않은 빈자리들 사이로, 몇몇 여자들의 수다가 귀를 찌르고, 불이 꺼지자 잦아드는 공기, 소리, 그리고 영화가 시작됐다. 전도연의 시선을 따라가는 '멋진하루'는 화가 나서 시작했다가, 용서로 끝난다. '밀양'에서 전도연이 용서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그녀가 스스로를, 그런 남자를 사랑하고 버린 자기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끝난다. 상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내뱉은 "웃기시네" "쳇" "입다물고 있어" 같은 대사는 사실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고, 나중에 씨익, 하고 짓는 미소는 스스로에게 준 것이면서, 또 상대방에 대한 최초의 애정의 표시이기도 하다. 엄마를 잘 보내..
어릴 때, 동생이랑 싸웠거나, 엄마한테 혼나거나, 괜히 외롭고, 또 슬플 때, 나는 종종 일기를 썼다.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실컷 쓰고 나면, 그러면서, 좀 울고 나면, 마음이 왠지 가벼워져서, 그리고 우느라 힘을 다써서, 일기장을 어딘가 치워놓고, 한잠, 푹 자곤 했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세상은 말끔해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웃었다. 몇 달동안 술을 한방울도 안마셨다. 전혀 마시고 싶은 생각도 안들던 그 몇달. 그런데 이틀째 밤엔, 누구와 같이 있던 자리였는지 기억이 안나는데, 맥주 한 잔을 받아마셨다. 안마시기가 힘들더라. 그날밤 소주도 한잔 마셨다. 그리고 대구에 있던 그 며칠 동안의 밤엔 매일 맥주 다섯잔 정도를 마시고 잤다. 잠이 안오는데 혼자 말똥거리며 또 눕게 될까봐 겁이 나서. ..
내가 어릴 때, 엄마는 여러 번, 당신은 해지는 시간이 싫다고 말하곤 했다. 해지는 시간의 노을과 낮은 해그림자가 서럽고 슬퍼서 싫다고. 그 말을 할 때의 엄마 표정이 너무 처연해서, 나는 엄마가 그런 말을 하는 게 두려웠다. 어느 초저녁, 그 서럽고 슬픈 감정에 이끌려 엄마가 멀리 가버릴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해지는 시간에 엄마랑 같이 있으면 초조한 기분이 들곤 했다. 스무 살 때부터 엄마랑 떨어져 살면서도 해지는 시간이 되면 가끔 엄마의 그 말이 생각났다. 물끄러미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의 그 두려움을 반추하던 시간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해지는 시간을 느긋하게 느끼게 되었다. 해질 무렵의 빛과 바람은 영어 단어 soothe를 떠올리게 한다. 낮동안 치열하게 뛰어 놀다지쳐 이제 ..
지금은 날짜도 가물가물 하지만, 나의 초경은 초여름 즈음이었다. 밤새 몸에 열이 후끈거려 잠을 설치고, 새벽에 잠을 깨 화장실에 갔는데 팬티가 빨갛게 젖어있었다. 아, 이게 생리라는 거구나, 깨닫기도 전에, 덜컥 겁이 났었나, 아님 안도의 느낌이 들었던가. 부엌에서 아침쌀을 씻으려는 엄마에게 가서, 초경을 알리고 면으로 된, 엄마가 미리 사다가 삶아빨아 잘 개켜둔 생리대를 내 손에 받았던 기억. 나는 워낙 불규칙적이어서, 몇 일이면, 딱, 생리 시작한다고 셈을 하는 친구들이 신기했다. 그래서 생리 첫날이 언제 들이닥칠까, 어릴 땐 늘 불안했다. 지금은 이제 그 들쑥날쑥한 날짜도 익숙해져서 몸이 어떻게 변하나 잘 지켜보다 생리 첫날을 미리 예감하고는 한다. 몸이 열이 좀 나고 졸음이 막 쏟아지고 괜스럽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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