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종일 지옥같았다.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부족한 듯 하고, 무엇을 해도 불안과 불만이 떠나지 않았다. 초조하게 이 일 저 일을 건드리다가 퇴근 했다. 지옥의 시공간을 빠져나가듯, 도망치듯, 집으로. 집에 가니 Y는 잔뜩 화가 나있었다. 세시쯤부터 은규를 재우기 시작했는데, 다섯시가 넘어서 잤다는 거다. 두어시간을 아기 재우느라 진을 뺐더니 머리가 아프다고. 그래, 이런 상황이 가장 힘들었던 거 같다, 지난 11개월 남짓의 기간동안. 일터에서 번 아웃된 몸과 마음으로 집에 오면, 나보다 더 힘든 하루를 보낸 것 같은 내 파트너와 영문도 모른 채 엄마와 아빠에게 기대고 있는 아기가 있는 저녁. 이럴 때 내게는 어떤 생각들이 피어올랐나, 나는 어떤 마음이었나 돌아봤다. 외롭고 서럽고 한편으로 불안하고 ..
공고 연구 면담이 거의 끝났다. (내가 끝낸 건 아니고 방학이라 더 이상 불가능;;)지금은 면담한 거 분석 중인데, 거북이, 아니 지렁이 걸음마다. 마음만 바쁘고 손은 느려.밭에서 풀 매듯이, 부지런히 그러나 꾸준히 해야지, 마음 먹어본다. 면담 다닐 땐 제법 내 마음을 무겁게 했던 녀석인데, 막상 전사한 걸 보니 녀석의 얼굴이 안떠오른다.이름도 모습도 무지 평범했던. 그런데 사진을 참 잘찍어서, 녀석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도 모르게 위로받았던.근데도 얼굴이 잘 생각이 안난다. 더위를 온몸으로 받으며, 버스 두번씩 갈아타고 다녔던 면담.나는 학생들을 만나며 내가 많이 성장하고 있다 여겼는데, 실은 그 수많은 면담 시간 속에서도나는 나만을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연애가 끝났는데, 상대방보다 내 마음의..
지난 유월에 '정책연구에서의 질적연구방법론' 특강을 하셨던 김정원 선생님 강연 내용을 오늘에서야 정리했다. 노트에 필기해놓은 것을 이제사 펴 놓고 그 때의 느낌과 생각들을 더듬어본다. 어젯밤에 아기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며 생각했었다. 김정원 선생님 강연 중 제일 좋았던 것은 "질적 연구는 연구자 자신이 성장하는 과정이다"라는 말씀이라고. 만약 선생님께서 "질적 연구를 통해 학교 현장의 문제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며..." 라는 식으로 말씀 하셨다면 별 감흥이 없었을 거 같다.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서 연구한다는 것은 참 그럴 듯해보이면서도 위험한 일인 것 같다. 도움을 주는 위치라는 게 얼마나 달콤하고 자기 위안적인가. 그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늘 깨어있어야지, 하면서도 자주..
몇 주 전이었던가. 연구실 문을 열어두고 일하고 있는데 원장님이 깜짝 방문. (연구실이 있는) 4층에 올라왔다가 음악 소리가 들려서 왔다며 (다른 연구실에 방해가 될지모 모르니) 문을 닫으라고 하셨다. 알겠다,고 문을 닫으려는데, "아직도 음악 들으며 공부해요? 나는 학교 다닐 땐 그랬는데, 연구원 다니면서는 음악 들으면서는 일이 안돼요"라고 말씀 하셨다. 그 땐, 아 그런가요, 하고 지나쳤다. 오늘은 정성하의 기타연주를 들으며 일을 한다. 아직 스무살이 안된 이 어린 기타리스트의 음악이 마음의 어떤 부분을 살살 건드리는 것 같다. 비오고 흐린 오늘 같은 날씨엔 기타가 피아노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것도 같고. 수많은 행정서류를 기입하고 영수증을 첨부해 회의록을 제출하고 기안을 하고 회의 일정을 잡고 연구 ..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족할 수 있다. 연구 과정에서 내어놓는 글들, 어디선가에서 하는 이야기들, 연구 아이디어나 발표 코멘트 등등,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부족할 수 있다. 완벽하지 않으니 나는 공부하고 또 한다. 그래서 부족함 그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이 부족함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평가의 대상으로 보면 위계가 생기고 등수가 붙는다. 그렇게 보지 않으면서도 부족함을 채우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부족하다. 그래서 안전하다. 오늘은 이 정도만 확인되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것인가.
오랫만에 책상을 정리했다. 생각과 마음이 복잡할 수록 여러 종류의 책들과 문서들이 질서 없이 쌓여가는 것 같다. 어제는 하루종일 마음이 복작거려서 힘들더니 오늘은 좀 낫다. 더구나 점심 먹고 돌아와서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조금 맑아진다. 오전 내내 지끈대던 두통도 좀 개인다. 그래서인지 미뤄뒀던 회의비 정리를 하고, 책상정리할 의욕도 생긴다. 정리 좀 하고 앉아있으니 불현듯 평화롭다. 마음이 이래저래 무거울 때는 무거운 데로 두는 것도 방법이지 싶다. 중요한 것은 무거운 것을 아는 것, 무거운 것을 문제삼지 않는 것. 그렇게 두면 다시 의욕이 생기고 뭔가 하게 되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나를 믿어줄 것.
민주주의 시리즈들을 읽고 있다. 2013년에 나온 이 책들은, 바빠서 정신없어서 여유없어서... 등등의 핑계를 대면서 읽지 않고 쌓아두었던 것들이다. 새삼스레 민주주의,가 요즘 나의 화두가 돼서, 일터에 나와 야금야금 읽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박복선의 '민주주의 교육과 그 적들( 15호)'을 읽었다. 요며칠 내 머릿속에는 있었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것을 정확히 서술하고 있는 문장이 있어서 옮긴다. "좋은 민주적 공동체라면 구성원 누구나 자기 잠재력을 발휘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몫을 받아야 한다. 누구나 있는 그대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담고 있는 '누구나 존엄하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46)." 있는 그대로 ..
일터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니 미워하는 사람도 생기는 거지, 라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거꾸로였다.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는 거다. 미움의 감정을 같이 풀고 나눌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으다. 암튼 그래서 이제 나의 일터에는 좋아하는 사람/미워하는 사람의 구도가 명확해졌다. 눈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씨익, 웃게 되는 사람과 일부러 웃으며 인사해야하는 사람. 흐흐흐. 어제 ㄱㅎㄹ샘이 우리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면서 무려 2시간 반을 수다를 떨고 갔는데, 나보다 나이도 직장생활 경력도 많은 샘의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 감이 잡힌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직장생활을 하는 거였다, 일터에서. 나도 일터에서의 삶을 시작하면서는, 사람들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살아야지, 했는데 어느새 막막 나..
겨울낮이다. 간만에 날씨가 너무 좋다, 맑다. 어제,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을 보면서 맑은 겨울 하늘이 보고프다, 했는데 선물처럼, 오늘, 참 맑은 날. 보고서 마감일은 다가오는데 내 마음에는 차지 않는 원고를 마주하고 앉아있는 일이 참 싫다. 그런데 시간은 째깍째깍, 가고 있어서, 지금 시점에서, 이런 상황이 참 싫다,라는 마음에 뺏길 에너지가 없는데. 이계삼 선생님이 한겨레에 쓴 칼럼을 보고서 써보겠다고 혼자 깨있던 새벽에 읽었다. 고통의 해석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글을 읽으며 옷깃을 여기게 된다. 지금-여기-나,는 무엇을 응시하며 어떤 순간들을 보내고 있는지. 마감일이 다가와도 보고서가 마음에 안들어도 이 순간의 맑은 날씨와 건강한 내 몸과 나를 기다리는 아기와 나와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존..
토요일, 동거인이 풀무학교와 홍동면을 다녀왔다. 농사를 가르치는 학교에서 농사를 배운 아이들이 그 마을에서 농사 지으며 사는 것. 어찌 보면 간단한 일인데, 한국사회에서 이 일은 간단치만은 않다. 근데 이런 일이 50여년 동안 풀무학교와 홍동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마을은 생산-교육-생활의 자급을 이루고 산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기반이 된, 삶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생산하며 사는, 흙에 가까운 삶. 나는 동거인이 전해주는 풀무학교와 홍동면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한 이념, 정교한 전략, 정치세력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 삶을 변화시키고, 그 삶을 통해 주변 사람들을 동참시키면서, 그렇게 살면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 오늘 아침, 사무실에 나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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