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 연구과제 세팅이 한창이다.내가 복직하기 전에 이미 연구과제 리스팅은 얼추 된 거 같고, 지금은 연구원에서 수행해야할 전체 연구과제 건 수와 연구자별 건 수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 짓고 있다.그런데 나는 이 논의 과정이 불편하고 미심쩍다. 연구자 당 1년에 연구보고서 2건, 짧고 가벼운 현안보고 1건이 올해 '할당량'이다.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머리 굴려서 의미와 로드를 고려하며 해낼 수 있는 양이다.그런데 연구원 전체로 보자면, 이렇게 건 수 중심으로 연구를 '할당'하면 보고서의 내용과 깊이는 뒷전이 되기 쉽다.다른 일도 그렇겠지만, 좋은 연구는 (시간적, 심리적, 금전적) 여유와 자율성 속에서 나온다.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하게 나올 수 있을 때 성실성도 따라간다.연구자가 행복하지 않은데 좋은 연구가..
어제 Y와 대학교수의 장단점에 관해 토론하다가(별 걸 다 토론하고 있음ㅋㅋㅋㅋ) 알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는 하고싶은 연구를 하는 것. 또 하나는 학생들과 교실에서 만나는 것. 이 두가지는 교수가 안되면 못하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지금 상태에서는 어렵다는 것. 연구원에서 해야하는 연구와 내가 하고픈 연구를 병행하는 것은 어렵다. 내년에 할 연구 오퍼가 한 개 들어왔는데 못한다 했다. 시간에 쫓기면서 사는 건 지금으로도 족하니까. 그리고 강의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내년 봄 강의 하나 들어왔는데, 이것도 거절할 참. 강의와 연구원 연구 병행하며 살아가는 것도 자신이 없다. 둘다 아쉬운데... 그래도 점점 더 뭔가가 분명해지는 건 다행.
1.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와 텃밭에 갔다. 빨갛게 익은, 달고 신 딸기 일곱 알, 내 손바닥만한 가지 한 개, 루꼴라 잎 한 봉지, 상추 이파리 한 봉지 그리고 내일 아침 된장국 끓일 근대 한웅큼. 오늘의 수확물들. 아이는 딸기를 물에 씻어 그늘 밑에 앉아 먹으며 아아아- 맛있다!를 연발한다. 작고 빨간 딸기를 아이의 작은 입에 넣으며 짓는 그 충만한 표정. 내가 한창 풀매기에 열중하는 동안 혼자 놀던 아이가 소리 친다. 이야- 저 새 너무 이쁘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아이가 가르키는 곳을 보니 노랑과 회색이 섞인 깃털을 가진, 비둘기보다는 작고 참새보다는 훨씬 큰 새 한마리가 어느 밭 장대 위에 앉아있다. 와- 진짜 이쁘네. 맞장구 쳐주며 나도 아이도 한참 새를 쳐다보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2...
연구원 동료들에게 밥 한끼 대접할 수 없을까 싶어 기획한 '힐링집밥' 프로젝트가 오늘, 기획한 지 거의 한 달만에 오픈을 했다. 메뉴는 닭고기 스테이크와 야채참치 샐러드. 디저트로 사과 두조각과 감잎차를 냈다. 차려놓고 보니 별 것 아니었는데, 준비하는 마음은 지난 주말부터 바빴다. 메뉴를 정하고 필요한 재료를 사고 꽃과 식탁보를 챙기고 마지막엔 부엌과 마루 청소까지. J선생님과 N선생님이 초인종을 누르던 그 순간 식탁 세팅이 겨우 끝났다. 밥을 퍼서 접시에 담고, 국을 그릇에 담은 후 식사 시작 직전까지의 그 흥분과 긴장. 생각해보니 누군가를 초대하고 그를 위해 밥을 짓고 집을 치우고 꽃을 사다 꽂아둔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거 같다. 부모님을 모실 때도 안그랬던 거 같고(내 실력 아시죠? 대충;;; 이..
1. 휴직한 지 어느새 두달이 훌쩍 지났다. 휴직 후 한달 반쯤은 보고서 마무리로 틈틈히 일을 해야했으니, 실은 새해에 들어오면서 오롯이 전업주부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침에 일어나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반찬 준비를 위해 물을 끓이고 채소를 다듬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거의 종일 아기의 요구와 부름에 응대하고 같이 놀고 씻겨주고 안아주고 재워주는 와중에도 짬짬이 책도 읽고 샤워도 하고 화장도 하고 옷도 차려입고 짧은 외출도 하고 커피도 갈아서 내려마시고 간식도 냠냠 먹는 소소한 생활, 소박한 일상. 반찬 만들기, 청소하기, 빨래하기와 시장보기 등등 조금씩 익숙해지고 재미있어지고 나름의 속도와 일머리를 익히고 있는 중이다. 2. 아기는 쑥쑥 자라고 있다. 며칠 전에 키를 재봤더니 또 훌쩍 자..
육아휴직 3주차. 새벽에 잠이 번쩍 깼다.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지난 몇 달 동안 흔히 해왔던 일.근데 급하게 해야할 일이 없다. 이미 보낸 보고서 파일을 열어서 요약 부분을 읽어본다.읽다가 지금 뭐하고 있나 싶어서 파일을 닫고 에버노트에 지난 며칠간 뭐하고 살았나 메모했다. 휴직 첫주는 제주도 여행을 갔고,둘째주는 본격적으로 은규 밥해먹이고 집안일 하면서 두 개의 보고서 마무리해서 보냈다.셋째주인 이번주는 주초에 좀 우울했고, 주중에는 두어개 약속이 있었고, 뭣땜에 휴직을 했었나 돌아봤고, Y랑 마음과 의견을 조율하느라 지직대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불안한다. 무엇이 불안한가 봤더니, 이렇게 시간 보내다가 나중에 해야할 일을 못다해 허우적댈까 걱정된다.못다한 일이란 무엇일까. 보고서 마무리..
어제 아침엔 표고 버섯 불려서 당근이랑 같이 볶고, 무 채를 썰어 멸치다시 국물에 끓이고 들깨를 넣어 국을 만들었다. 저녁엔 오징어와 쪽파를 넣은 파전을 구웠다. 그저껜 열무 김치를 담았다. 안방 바닥을 싹싹 쓸고, 요일별로 어디를 어떻게 청소할 건지 계획을 세운다. 은규는 엄마랑 찰싹 달라붙어서 어리광을 자주 보여준다. Y는 좀더 유쾌해졌다. 왜이렇게 기분이 좋아? 하니깐 가부장이 된 느낌이야, 하하하, 한다. 가부장답게 돈 많이 벌어와, 하니깐 잠시 기가 죽기는 했지만.ㅋ 휴직 후에도 보고서는 아직 안끝났지만 일상이 변해가는 건 사실이다. 지금까진 좋으다. 오전에 까페에 나와 커피 마시며 보고서 마무리 하고 있는 이 시간도 마음에 들고. (이제 은규 데리러 가야할 시간.ㅎ)
휴직 6일차. 그런데 아직 보고서는 끝나지 않았다. 이 끝나지 않음, 자체가 주는 고통이 어마어마해서, 위로가 필요한 토요일 새벽-아침을 지나 한낮이 되었다. 파일을 열어 한 글자라도 더 치고(쓰고,가 아니라 치고!) 있어야할 마당에, 블로그를 열어 글을 남긴다. 이 괴로움을 기록해두고 싶어서. 아침을 먹고 커피 믹스 한 잔 거뜬히 마셨는데도 잠이 안깨는 기분. 원두 커피 한잔 내려 다시 책상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블로그를 엿보고 다닌다. 이제 다시 보고서로 돌아갈 시간. 내 속도는 느린데, 나는 빨리 달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유능함에 대한 환상 혹은 집착. 초여름 밭의 풀 매듯이, 이른 새벽 백팔배 하듯이, 한땀한땀 바느질 하듯이. 느려도 멈추지 말고.
이제 삼주 남았다. 그래도 하루하루는 그 나름의 무게와 짜증을 가지고 시작.ㅋ 게다가 오늘은 월요일이라 Y의 심기가 더 불편하고, 아기도 덩달아 짜증을 내면서 '엄마 싫어, 미워, 가' 연발탄을 쏴주신다. 터덜터덜 출근길에 차에 치여 죽은 강아지를 보았다. 하얀 털에 피가 맺혀서 거리에 누워있는. 해탈주 세 번을 외며 걸었는데, 마음이 아프고 아팠다. 출근해서는 음악을 틀고 커피를 타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 해야할 일들을 체크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해야지, 하는데, 꿈결인가 뭔가 창밖으로 나는 새소리에 기분이 좋았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산다는 게 그런 거지, 뭐 하며 제법 쿨한 척 했던 순간이었는데, 그게 언젠지 기억이 안난다. 워킹맘으로 혹은 맘워커로 살아온지 이제 일년 두달이 거의 ..
어젠 오전에 학습부진 연구 심의를 받고 오후엔 한차례 노조 간부 회의를 하고 저녁엔 노조 토론회를 했던, 아주 길-었던 하루였다. 집에 돌아오니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Y를 꼬셔서 맥주 세 캔과 포카칩 한 봉지를 사와서 마시고 먹고 놀다가 두 캔을 더 나눠마시고 잤다. 낮엔 열심히 일하고 밤엔 열심히 놀고 잤더니 아침에 몸이 무겁다. 근데 뭐 마음은 갠찮네, 가볍네. 어제 저녁 토론회는 재미있었다. 사무처 선생님들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 일터가 민주적인 조직문화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론 얼마나 위계적이고 권위적인지 새삼 알게 된다. 다행스러운 건 '그들'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우리'끼리 이렇게 마주 앉아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긍정적으로 느껴졌다는 것.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변화시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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