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가 있다, 공부가 드럽게 안될 때. 단 십분 동안의 집중도 안될 때. 그럴 때, 인터넷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가방 싸서 휙 도서관을 나가버리기도 하고, 극장에 가 앉아있거나 오래된 공원에 가거나 친구를 불러내기도 했던 것 같다. 일찍 귀가해 티비 앞에 붙어있기도 하고 낮술을 마시러 학교 앞 술집에 가기도 하고. 최근의 깨달음으로는, 이런 경우에도, 스스로 정한 시간만큼은 앉아있는 게 낫더라. 단 십분 어치의 성과밖에는 못 얻어도, 그냥 하기로 한 만큼은 앉아있기. 그러다보면 들썩이던 엉덩이도 숨이 죽어 잠잠해지고, 절대 안될 것 같은 집중도 조금씩 된다. 무엇보다 몸이, 가만히 앉아서 읽고 쓰고 생각하는 리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물리적으로나마, 나를 여기 책상 앞에 가만히 둔다,..
저 달이 걸어오는 밤이 있다 달은 아스피린 같다 꿀꺽 삼키면 속이 다 환해질 것 같다 내 속이 전구알이 달린 크리스마스 무렵의 전나무 같이 환해지고 그 전나무 밑에는 암소 한 마리 나는 암소를 끌고 해변으로 간다 그 해변에 전구를 단 전나무처럼 앉아 다시 달을 보면 오 오, 달은 내 속에 든 통증을 다 삼키고 저 혼자 붉어져 있는데. 통증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 다시 그 달을 꿀꺽 삼키면 암소는 달과 함께 내 속으로 들어간다 온 세상을 다 먹일 젖을 생산할 것처럼 통증이 오고 통증은 빛 같다 그 빛은 아스피린 가루 같다 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다 - 허수경, -------------------------------------------- ㅇㄴ네 블로그 갔더니 허수경의 시가 있어서, 그 시가 내 마음에 짠..
나는 스스로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꽤 오래 공부를 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기질인 건지, 요즘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새삼 내가 에너지 양 자체가 많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 토론토에 함께 온 양은, 그를 알고 지낸지 8년 여만에 처음 알게된 건데, 에너지가 참 많다. 주말이나 휴일엔 집에서 쉬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걷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무가지, 유가지 할 것 없이 끊임없이 영어로 된 신문을 읽고 광고판이나 티비 프로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토론토 시내 지도도 열심히 봐서 뭐가 어디 있고 어떻게 가보면 되는지 머리 속에 저장해두고, 여기 저기서 열리는 행사들도 미리미리 알아봐서 스크랩한다. 서울에 있을 땐 이 사람 저 사람 이 모임 저 모임 만나는 사람도 많..
두 밤만 자면 떠난다. 긴 기간도 아니고, 혼자 가는 것도 아닌데, 막상 꽤 뒤숭숭하다. 그제와 오늘, 아버지랑 통화했는데, 서운하신 것 같다. 한참 못보겠네, 하는 문장의 끝이 흐리다. 내 마음도 젖는다. 오늘 ㅇㅎ이랑은, 두시간 동안 천천히 저녁을 먹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한참 이야기 나눌 때는 몰랐는데, 막상 각자의 집으로 돌아설 때, 그냥 좀 헛헛하다는 걸 느꼈다. 여비를 챙겨주신 지도교수님이 택시를 타고 떠나는 걸 가만히 보았던 오늘 오전에도 좀 마음이 휑했다. 괜히, 겨울철에 떠나서 마음이 이런가 했다. 내일이면 내동생과도 이모들과도 조카와도 시부모님과도 또 내 사랑하는 친구들과도 작별 전화를 해야하는데, 좀 마음이 그렇다. 이렇게 짧은 이별에 뒤숭숭해지는 이 마음이, 지금 내 마음이다.
캐나다 대사관은 정동에 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조금 걸으면 이화여고 맞은편에 딱 있다. 대사관에 비자 신청 후 세 번을 갔다. 두 번은 비자 발급 독축하러, 한 번인 오늘은 '드디어' 발급된 비자 받으러. 근무 시간이 오전 9시에서 11시이기 때문에 올 가을 아침 중 세 번, 정동길을 걸을 수 있었다. 거긴 내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다. 비자 때문에 그 길을 반복해 지나가면서 조바심도 내고 짜증도 내고 후련함도 느꼈다. 변방의 작은 나라 출신, 이라는 내셔널리티를 그 길에서 절감하고 곱씹고 기억했다. 어떻든 기다리던 비자가 나왔고, 내주 초면 떠난다. 다시는 오지 않겠노라며 대사관 지하 화장실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오늘은 종일 광화문과 종로, 인사동과 명동을 쏘다녔다. 날씨가 추웠고 다리..
얼마 전 ㅅㅇ이랑 차 마시며 수다 떨던 중 그녀가 내가 물었다. "너 졸업하면 뭐 할거냐? 취직 자리는 있냐?" 나는, 물론, 취업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그러나, 그럴 듯 하지 않아도, 뭔가 내가 세상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매우 추상적으로 얼버무리고 있었다. 그러자 인도네시아를 필드로 논문을 쓰고 있는 그녀가 되물었다. "나랑 인도네시아 가서 그들에게 잘 쓰이며 사는 건 어때?" 농담처럼 흘린 이야기지만, 이런 제안을 해주는 그녀가 왠지 고마웠다. 작년 겨울 인도에 갔을 때, ㅇㅈ 언니도 비슷한 제안을 했었다. "나랑 딱 삼년만 여기 있는 가난한 여자들 지원하는 일 한 번 해볼래?" 그 땐, 난 논문도 써야 하고, 삼년은 너무 길고... 등등 머뭇거리는 마음이 많았는데, 돌이켜보니 이 제안..
토론토로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자가 안나와서어요. 비자 발급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하네요. 일상이 참 '쑥쑥'하네요. 마루에 큰 가방 네 개가 떡하니 짐 싸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출발 일자가 안 정해져서 착착착 진행을 못하고 있답니다.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하는 일상. 이런 시간은 처음 겪어보는데, 생각보다 좀, 힘이 드네요. 어쩌면 국적이 없는 수많은 디아스포라들의 삶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어떻든, 떠나기로 예정되어있던 날인 그저껜 간만에 밤 늦게까지 놀았고요, 어젠 종일 집에서 뒹굴거렸어요. 시간이 갑자기 선물처럼 주어진 것 같은, 남은 며칠동안, 논문 관련 자료 더 챙기고 집 정리, 짐 정리 알뜰하게 해야겠어요. 무엇보다 단 며칠이라도, 어느새 잎들이 물들어버린 서울의 가을을..
요즘, 친구들과의 환송 모임이 잡히고 큰 트렁크와 이민 가방을 빌리느라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습니다. 나의 동거인이자 이번 여행의 동행인인 y는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친구들과 환송 술자리를 갖고는 오늘 하루 종일 빌빌대네요.ㅋ 출국 전까지 해야할 일을 리스팅해보니 만만치 않습니다. 추석 때 대구 집에서 가져온, 엄마가 입던 무스탕을 리폼해서 거기 가져가려고 하니, 수선 기간이 거의 출국일까지의 날들과 맞먹습니다. 지난 주, 다른 진료는 빼먹고 가더라도, 치과 검진은 받아야겠다 싶어 갔다가 스케일링 예약을 오늘 오후로 잡았어요. 그래서 오늘 스케일링을 받았는데 잇몸 염증이 장난아니라며, 어찌 이렇게 관리를 안했냐며, 친절한 치위생사 언니가 막 야단을 치네요. 평소에 오른쪽 윗 어금니로는 오징어를 씹을 수..
이사간 새집은 마음에 들어요. 전에 살던 곳보다 넓은 것도 좋지만, 오전과 낮에 조용한 것이 좋더라구요. 그런데 아직 인터넷 신청도 안했고 책상, 책장 정리도 못한 채 어질러져 있어요. 집에서 안정적으로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매일 처리해야할 일들, 진척시켜야할 일들이 닥쳐오곤 합니다. 머리가 조금 아프고 열도 좀 나는 며칠이 계속 되고 있고, 기분은 가벼웠다가 불안해졌다가 놀고싶다가 차분해졌다가를 반복하고요. 다행인 건 날씨가 맑다는 것. 특히 오늘 햇살과 하늘과 구름은 환상적이네요.
내일 아침이면 이 집을 떠난다. 2년 반을 거의 꽉 채워 살았다, 봄에 와서 가을에 떠나는. 이 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바로 부엌. 요리 시간을 즐겨서라기보다는 식탁 의자에 앉아서 보는 뷰가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식탁에 혼자 앉아 책을 보거나 밥을 먹거나 음악을 듣거나 차를 마시는 시간도 좋았고, 특히 비오는 날엔 부옇게 습기가 찬 베란다 창 너머로 녹색이 보여서 좋았다. 이 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오후 늦게 창을 열어두고 가만히 바깥의 소음을 듣고 있던 네 다섯시 즈음의 시각들. 서향인 큰 방 안으로 해가 길게 들어오고, 방은 밝은 기운으로 가득한데 양 쪽으로 열어둔 창으로는 오후의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곤 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이 담뿍 든 이 집, 이 동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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