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면 그 계절들을 어떻게 살아냈는지 가물가물하다. 그 때 끄적여놓은 일기들을 보면 나름 뭔가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던 거 같은데, 그 애씀도 실은 괴로움의 연장선상에 있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논문 프로포잘도 하고, 정토회에서 봉사도 하고, EWB 일도 제법 했다. 다음 해 봄에 요세미티에 다녀왔고, 그 여름엔 부르키나파소를 갔다. 파리를 경유했던 열흘 간의 일정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여름 낮이었다. 바닥난 체력과 정신력으로 현지 타당성 조사,라는 임무를 맡고 낯선 땅에 다녀왔으니 그 열흘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힘겨움도 이제야 알겠다.ㅎ 속이 완전히 다 뒤집어져서 먹는 것마다 다 내어놓았던 며칠을 지나 집에 도착했는데, 부엌에서 양은 김칫국을 데워줬다. (그 때 우린 김칫국을 자주 해먹었..
한밤에 둘이서 몰래 캄캄한 노천 욕탕에 들어갔다.울창한 숲의 향이 낮보다 한층 짙게 풍겼다.세찬 강물 소리가 어둠을 헤치고 흐르고 있었다.삼나무와 대나무 숲을, 뽀얀 달이 비추고 있었다.뜨거운 탕에서 피어오르는 김에, 모든 것이 환상적으로 번져 있었다.우리는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맥주를 마셨다.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몸이 불어 쭈글쭈글 해졌을 즈음, 어둠에 눈이 익어 별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을 즈음.눈앞 대나무 숲에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가늘고, 하얗게, 이쪽을 보고 있다.그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이었던가."나는 보이지 않아. 하지만 느껴. 저 네번째 키 큰 대나무 언저리에."하치가 말했다.".......다."나는 말했다."그렇군. 배웅하러 온거야. 하코네에서 죽었으니까.""아직 이승에..
아빠랑 소아과에 갔다가 잠시 까페에 들렀단다. 집 앞 까페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모양이 대견하다.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지도도 없이 스스로 갈 길을 아는 여행자처럼, 아기는 누구보다도 담담하고 씩씩하게 매일 매순간 자라고 있구나, 새삼 알게된다. 요즘은 연구 과제를 제출하고 승인을 기다리며, 새 연구과제의 시작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그 와중에도 다이내믹한 이 일터에는 매일 새로운 일들이 터지고, 어젠 휴가로 집에 있는 동안에도 두 통의 전화를 동료로부터 받았다. 이 곳도 바깥 사회의 권력관계 자장 안에 있다. 누군가를 이렇게 저렇게 대우하면서, 어려서, 학위가 없어서, 여자라서 차별하는 거라고는 스스로는 생각치 못하겠지. 그래서 토론과 공론의 장이 필요한데, 이제는 그마저도 쉽지 않은 분위기이다...
일터에서의 연구과제 때문에 만난 한 선생님께서 업무 메일에 노래를 하나 붙여 보내셨다. "꿈찾기"라는 노랜데, 전주를 듣는 순간 마음이 아득해진다. 이 노래는 대학 때 잠시 활동했던 노래패에서 단짝 친구 ㅇㅊ가 어느 공연에서 불렀던 것. "꿈을 찾아떠나는 설레임 속에~" 이 가사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발장단을 맞추게 되는, 그 시절 ㅇㅊ의 목소리가 생각나는 노래. 아 좋다. 대학 때 천둥벌거숭이처럼 (불법으로 점거해서) 거리를 누비고, 노래패니 학회니 학생회 선거니 하며 그 추운 캠퍼스를 종횡무진하고, 누구든 맞붙어 토론하고 술도 많이 마시고 장난도 엄청 치고 웃기도 많이 했던 덕에 지금의 내가 있구나, 싶은 저녁이다. 추억에 잠시 빠지게 해준 노래에 감사. 그 노래 보내주신 선생님께 감사. 그리고 그 ..
가을이 가고있다. 올해만큼 가을이 예쁘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나, 싶다. 물든 나뭇잎들이, 가을 햇볕이 이렇게 사라져가는 게 아쉽다. 알고보면, 모든 날들이, 모든 순간들이 이렇게 사라져가는 것이겠지만. 이사 온지 한달 남짓 지났고, 새 일터에 다닌지도 두달이 넘었네. 아직도 수원이 낯설고, 이 직장에 얼마나 다니게 될지 불투명하지만, 좋아하는 사람도 생기고, 하고싶은 일들도 생기고, 집도 많이 익숙해졌다. 지금, 행복해? 라고 물으면 엉? 하겠지만, 감사한 일들이 많다는 데에는 고개가 끄덕. 건강하게 일할 수 있고, 돈도 벌고 있고, 아기도 잘 자라니, 참 고맙다. 그러면서도 뭔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은 여전히 있고. 출퇴근길에 자전거를 주로 타다가 요며칠은 걷는 날이 더 많다. 날이 더 추워지..
아기가 칭얼대서 새벽 다섯시쯤 깼다. 자다가 쉬야를 많이 했는지 기저귀 근처 바지까지 젖어서 잠 못들고 뒤척이는 것 같았다. 젖 먹여 재운 후 잠든 아기의 기저귀를 갈고 바지를 갈아입힌다. 녀석은 잠결에 엄마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까. 영원히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지며 아기를 들여다 본다. 그러고 나니 잠이 깨버려 마루로 나와서 오늘 오전에 있을 이야기 모임 관련 논문을 읽고 있었다. 양도 잠이 깼는지 마루로 나오고, 간만에 둘이 딩굴딩굴 얼굴을 마주보고 목소리 낮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고보니 간밤에, 나도 양도 씻지 않은 채 잠이 들었구나. 퇴근 후 나는 나대로 지치고, 그 무렵 아기 돌보는 일에 양도 지치고. 그래서 종종, 아기를 재우기 위해 불 다끄고 세 식구 모두 자장자장 누워있다가 그 상태로 ..
오늘, 1년 8개월만에 수영장에 갔다. 새로 사두었지만 거의 입지 않았던 까만색 (몸에 착 달라붙는 부드러운 느낌의) 수영복을 입고 물 속을 휘잉 휘잉 헤엄쳤다. 열쇠를 받고 라커룸에 들어갈 때 약간의 긴장과 흥분이 느껴졌다. 수영을 하면서, 씻고 나오면서 이런 저런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는 듯 했다. 물 속에 있으면 이런 느낌이었지, 팔과 손을 이렇게 움직이면 몸이 이렇게 슈욱 나가는 거였지, 수영을 하고나서 잠시 쉴 때의 숨가쁨은 이런 거였지, 운동을 마치고 씻고 나오면 이런 바람이 불어오곤 했지... 다 까먹은 줄 알았는데, 몸은 다 기억을 하는 듯, 자연스럽게 물 속을 움직였다. 수영장에서 작년 가을학기 수강생이었던 ㄴㄱ를 만나기도 했다. 그 클래스는 약간, 인생을 나누기도 한 수업이어서 내겐 좀 ..
주말에 만났던 어떤 사람의 화법이 기억난다.하고싶은 말을 참 담백한 표정과 어투와 목소리로.반가워, 한마디에 담긴 진심이 바로 느껴진달까.꾸미지않은 그 방식이 오히려 마음에 더 전달이 되는 듯. 연어초밥과 데친 꼬막으로 저녁을 거나하게 먹고아기 이유식도 제법 많이 먹이고 내 체력은 고갈.열시 좀 안돼서 아기 재우면서 나도 곯아떨어졌다.낮에 아기랑 산책 삼아 다녀온 텃밭은 온통 작은 풀들.작지만 반짝이는 그 생명력이 내 안 어디엔가도 있겠지. 낮에 들렀던 까페에서 문득 다음 연구는 가난과 관련이 있겠다 싶었다.다시 연구라는 걸 하게 되긴 할까, 의심이 들긴 하지만.ㅋ 허름한 옷에 오래된 모자, 대충 세수하고 나간 내 몰골이세련된 사람들 가득한 까페에서 자각되던 순간, 창피해서 움츠러들었다.내 가난을 들킨 ..
1. 꽃무늬 외투를 입고 싶다. 누빔 원단으로 된 것도 좋고 아니라도 좋고. 온라인 샵에서는 잘 못찾겠다. 네 다섯시간 명동이나 홍대 앞을 누비고 다니던 시절이 그립네. 2. 간밤 꿈에 파아란 바다가 나왔다. 때로 내 꿈에 등장하곤 하던, 푸르고 깊고 차지 않은 바다가 아니라 정말 코발트 빛깔의 바다. 멀리 수평선을 보면서 아 좋다, 했던가. 오늘은 만(灣)에 접해있다는 한 작은 마을 고즈넉한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꿈 속에서와 달리 왠지 피로하고 오고 가는 길이 길게 느껴졌다. 돌아와서 아기랑 길게 잤다. 간만에 낮잠을 곤히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저녁. 어렸을 적엔 낮잠 자고 일어나 깜깜해져있으면 왠지 울고싶었는데. 우리 아기는 오늘 어떤 기분으로 깨어났을까. 3. 이제 수요일이면 컴백홈. 길다면..
남원 여행 8일째.오늘 처음으로 바깥 산책을 했다.봄처럼 따뜻한 날씨, 작은 도시의 관찰자 노릇하며 걸으니 좋더군. 낮시간에 좀 쉴 수 있고, 아기와 단둘이만 있다는 고립감이 덜하지만,일주일이 넘어가니 뭔가 '말이 통하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는 욕구가 슬쩍 생긴다.네, 네 알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네 그렇겠네요, 아뇨 그건 아니구요...가내가 요즘 주로 하는 대사들.이런 말들 말고, 좀 길게 내 마음과 내 생각들에 관해 이야기하고그 사람의 느낌과 생각들도 들어주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중이다.이런 대화가 안된다면, 이야기를 담은 글들, 소설이나 남의 인생 서사들이라도좀 듣고/읽고 싶다.이런 바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내가 참 좋은 친구들과 만나며정서적, 지적 유대 속에서 살아왔구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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