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꽤 오래된 (공개하기 싫은) 습관이 하나 있는데, 그건 생리 직전 우울을 인터넷 쇼핑으로 푸는 거다. 나름 소박한 삶을 지향하며 생활의 여러 방면에서 돈 아끼기를 제법 잘하는 나임에도, 3-5만원 가량의 (동거인의 표현을 빌자면) '저질 의류'를 사재끼는 것으로 생리 직전의 우울감을 풀어버리는 쾌감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쇼핑은 거의 대부분 매우 충동적이어서, 결재할 때는 닳아없어질 때까지 입을 수 있는 실용 아이템이라 굳건히 믿어의심치 않지만, 막상 배송을 받아 입어보고서는 아, 이거 어디 입고 나가지... 하면서 난감해하곤 한다. 이번 달 아이템은 쨔잔~ '올인원'이다. 어제 거울 앞에서 입어보았더니 이거 왠일인지, 너무나 흡족한 것이었다. 꽤 과감한 아이템이라 생각하면서도..
12월의 첫날인 어젠, 지난달 기고했던 학술지 편집위로부터 '게재불가' 판정을 받았다. 12월의 둘째날인 오늘, 논문계획서 도장 받으러 지도교수 연구실에 갔다가 주제를 엎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젯밤-오늘새벽, 글쓰기가 이렇게 괴로운 거였군, 새삼 깨달으며 채운 에이포 아홉장은 과거에 묻고, 다시 새 글을 쓰고 있다, 눈도 손도 발도 다 부었고, 어깨는 굳어가네. 꽤 하드보일드하다, 겨울의 시작. 그런데 이런 식의 고난은 견딜만 하다, 아니 즐길만 하다. 타박타박 한 발씩만 뛰어도 언젠간 퓌니쉬 라인에 도착하는 마라톤처럼, 부지런히 자판을 두들겨 한자씩, 정직하게 쓰기만 하면 되니깐. 노트북이 뻑가거나 내가 쓰러지지만 않으면 내일 새벽쯤엔 또 어설픈 글 하나는 완성될테니깐.
요즘, 잠이 잘 안온다. 불끄고 눕는 그 시간이 두려워질 정도. 오늘은 그냥 일어나 앉았다. 이러다 지치면 자겠지 싶어서. 그런데 갑자기 비가 후두둑 내리는 소리가 들리네. 좋다. 이렇게 깨어있으니 선물같은 새벽비가 갑자기 내려주는구나. 나는 비를 별로 안좋아한다, 잠깐은 괜찮아도 이틀넘어 오는 비는 몸도 기분도 쳐지게 해서 싫다. 거기가 여행지이든 일상의 공간이든, 춥든 덥든, 짱짱하게 해뜬 날씨를 나는 훨씬 더 좋아한다. 그래도 비오는 게 좋을 때가 있다면, 바로 이럴 때이다. 밤은 아직 머물러있고 방안은 따뜻하고, 아마도 창밖은 차갑디차가울 이즈음부터의 밤비. 창너머로 들리는 빗소리가 여기, 방안에 있는 나의 안온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서. 지금-여기의 내 안위를 구태여 창밖의 빗소리로 확인받는 이..
나는 성장소설이나 성장영화를 좋아한다. [개같은내인생]에서 주인공 남자애는 눈이 다 붓도록 밤새 엉엉 울지만, 아침에 일어나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광장에서 혼자 씨익- 웃는다. 아마 그 애는 그 웃음을 딛고 성장할 것이다, 자랄 것이다. 예전부터 내 일기는 늘 계몽적인 결말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오늘이 아니라 내일, 조금 더 성장할 나를 꿈꾸는 건, 어쩌면 필사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을 절망하거나 다음 순간을 회의적으로 보면서 살아내는 건, 계몽적인 다짐에 비해 더 힘이 들테니깐. 노희경의 드라마가 좋은 건, 상처가 버얼겋게 드러나면서도, 주인공을 비롯한 드라마 속 사람들이 조금씩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면서는 이제껏 몰랐던 게 딱,..
낮에 동네 시장에 갔는데 마침, 진눈깨비 내리고 바람이 세게 분다. 재에 필요한 물건들이랑 과일들을 사고 집으로 돌아와 내일 가져갈 물건들을 챙겨두는데 마음 한구석이 쓸쓸하다. 사십구재를 지내고 나면, 왠지 정말로 영영 이별이라는 생각에 오늘은 종일 가슴이 텅비어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워지고 흐려질 기억의 장면들이 자꾸 떠올라 다른 일이 손에 잘 안잡힌다. 이렇게 쉽지 않은 이 이별을 견디고 나면 봄이 와있었으면 좋겠다. 상을 치르고 집에 돌아온 다음날, 남은 식구들끼리 모여 크고 작은 것들을 의논하면서 사십구재 이야기를 꺼낸 건 나였다. 엄마가 생전에 절에 자주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남을 위해 빌어주기 좋아하고 먼저 간 귀신들의 안위를 늘 걱정하던 사람이었으니깐, 재를 지내주는 것이 엄마의 삶..
고시에 네번째 낙방한 ㅅㅇ이는 요즘 바락바락 돌아다니며 숨쉴 곳을 찾고 있단다. 나는 덜컥 논문계획서 발표 지원서를 냈다, 왠지 좁은곳에 몸을 피하긴 싫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달도 넘게 덮어둔 논문 관련 문서들을 열고 그 세계로 들어가니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한 주 내내, 논문을 왜 쓸까, 가끔 질문하면서도 그냥 기계적으로 매일매일 등교하고 있다, 가끔은 이런 규칙성이 매순간을 살아내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크게, 두 번 술을 마시고, 다음날 토할 게 더이상 없을 때까지 토하면서 더 우울해진 뒤로, 폭음은 않지만, 저녁 즈음이 되면 술생각이 날 때가 있다, 어떨 땐 패쓰,하고, 어떤 날엔 맥주 한두캔을 마신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반복되는 순간들. 이상하게, 사진을 찍는 게 딱 ..
지난 토요일 우연히, 권정생 선생님으로부터 '바람'이라는 이름(실명)을 얻은 한 아이를 만났다. 내 이름도 '바람'이라고 통성명을 하고선 잠시 권 선생님의 유서를 떠올렸다. 어제, 일요일은 종일 혼자 있었다. 몸이 피곤해 집에 누워있다가, 날씨 좋다는 문자를 받고서는 이 닦고 세수하고 대충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한 시간여 나무와 흙, 단풍이 많은 곳을 골라 걷고 걸었다. 빨간 산수유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고, 벚나무 잎파리들 붉게 노랗게 물들어 시들은 잔듸 위에 쌓여있었다. 은행잎의 노랑과 단풍잎의 빨강, 멀리 흐린 파랑의 하늘, 그리고 간간히 멀쩡한 햇볕이 길에 비췄다. 중얼대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조금 울기도 하고 또 웃기도 하면서 걷는 가을길 위에서 늦은 오후가 지나갔다.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고 죽..
비오는 평일 낮, 광화문 스폰지하우스 상영관은 눅눅하고 더운 공기로 가득차있다. 작은 극장, 그 마저도 채워져있지 않은 빈자리들 사이로, 몇몇 여자들의 수다가 귀를 찌르고, 불이 꺼지자 잦아드는 공기, 소리, 그리고 영화가 시작됐다. 전도연의 시선을 따라가는 '멋진하루'는 화가 나서 시작했다가, 용서로 끝난다. '밀양'에서 전도연이 용서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그녀가 스스로를, 그런 남자를 사랑하고 버린 자기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끝난다. 상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내뱉은 "웃기시네" "쳇" "입다물고 있어" 같은 대사는 사실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고, 나중에 씨익, 하고 짓는 미소는 스스로에게 준 것이면서, 또 상대방에 대한 최초의 애정의 표시이기도 하다. 엄마를 잘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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