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아버지가 나왔다. 우리(엄마 아빠 나 동생)는 그 전날 육체적으로 어떤 힘들 일을 겪은 후였고 나는 엄청 피곤했지만 새벽에 일어나 집으로 왔고(왜인지 나는 다른 집에서 잤다) 엄마와 동생은 자고 있는데 (엄마는 피곤해서 일어나야 하는데 못 일어나며 뒤척이고) 아버지는 잠에서 깨서 집안 정리 중이었다. 아버지와 마주친 나는 꿈 속에서도 그와 어색했다. 어색한 게 익숙할 정도로. 부자연스럽게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잠에서 깼다. 아버지가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 건가. 깨어나서야 드는 질문. 호스피스 병동에 누워계시는, 이 좋은 봄날 생명이 조금씩 사위어들고 있을 아버지. (기억이 있는 한) 평생 그를 좋아해본 적이 없는 것 같지만 지금의 아버지는 불쌍하다. 어제 잠들기 전, 병상에 누워계실 ..
대학 다닐 때 학교 정문 앞 커어다란 벚나무 겹벚꽃만 유난히 늦게 피는 걸 보고 왜 쟤는 항상 늦게 필까, 저긴 볕도 잘 드는 곳인데, 라고 생각했다. 그 나무가 어마어마하게 커서 갓 태어난 아기 주먹만한, 동그랗고 화사한 분홍꽃이 피면 너무나 환상적이었는데. 시간이 한창 지나고 올해가 되어서야 곳곳의 겹벚꽃이 이제서야 피어나는 걸 보며, 이 꽃은 벚꽃에 비해 이렇게 한 박자쯤 후 피는 거구나, 알게 된다. 이 꽃이 피는 때를 알게되는 데 25년이 걸렸네. 다른 진리들도 이렇게 천천히 천천히 하나씩 알게될 거다, 아마.
감자랑 당근을 씻고 다듬어, 작은 냄비에 물 조금 붓고 감자를 찌는 동안, 당근을 착착착착 채썬다. 감자 찌는 냄비의 물이 보글보글 끓으면 소금을 조금 넣는다. 채 썬 당근 위로 소금을 솔솔 뿌려놓고, 어묵과 새송이 버섯과 양파를 어슷어슷 썰어둔다. 감자에 젓가락을 찔러 푹 들어가면 불을 끄고 냄비 뚜껑을 덮어 남은 열로 조금 더 뭉근히 익을 수 있게 두고 냉장고에 있던 삶은 달걀과 마요네즈를 꺼내 섞고 으깨기 좋은 그릇에 넣고 감자도 넣어서 서로 잘 섞으며 막막 으깬다. 슬쩍 집어먹어보니 감자 삶을 때 넣은 소금 덕분에 따로 간 하지 않아도 맛이 딱, 감자샐러드 완성. 후라이펜에 기름 좀 넉넉히 두르고 불을 켜서 약간 달구며 마늘다진 것 충분히 넣어 슬슬슬 볶으며 마늘맛 가득한 기름을 만들고 거기다 썰..
엄마가 태어난 날은 매해 이렇게 처음 날이 따뜻해지는 즈음이다. 두꺼운 외투가 번거로워지고 자꾸 목이 마르고 가지 끝, 발 끝에 새 잎이 돋아난 건 아닐까 살피게 되는 첫봄의 날들 중 하루, 엄마 생신이다. 매해 오늘, 동생네랑 이모랑 만나 엄마 납골당에 술을 올리고 둘러앉아 점심을 먹고 헤어지는 리츄얼을 만들어둔 건, 참 잘 한 일이다. 봄소풍 삼아 모여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우리에게 엄마라는 뿌리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서로를 도닥일 수 있다. 엄마를 만나고 동생과 이모를 만나고 나를 만난다. 오래오래 이별의 슬픔과 고통을 안고 살아온, 그래서 더 씩씩한 나에게 잘 살고 있네, 하고 도닥여주는 시간. 마침 봄이 오는 길목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뭔가가 시작되는 타이밍이라 마냥 쓸쓸해하지 않아도 되는 ..
경포대 근처 두부집에서 순두부 찌개를 먹고 동네 작은 빵집에서 저녁과 아침으로 먹을 빵을 산 뒤 숙소가 있는 양양으로 향했다. 해안도로로 접어들자 오른쪽에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바람 때문인지 파도가 거셌다. 기사문 항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바닷가에 차를 세우고 파도와 바닷바람을 혼자 실컷 느꼈다. 차갑고 거침없던 바람과 파도소리. 마스크를 벗고 혼자 막막 웃다가 너무 추워서 차로 돌아와 숙소로 향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가는 혼자만의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태어나 처음이다. 가끔 혼자 길을 떠났어도 목적지에선 일행을 만나 함께 다녔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였던 적은 정말 처음이네. 마흔 일곱이 시작되는 즈음, 나에게 일어난 일. 당연히도 다 좋지만은 않았다. 여자 혼자라 변을 당하면 어쩌나 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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