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가고있다. 올해만큼 가을이 예쁘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나, 싶다. 물든 나뭇잎들이, 가을 햇볕이 이렇게 사라져가는 게 아쉽다. 알고보면, 모든 날들이, 모든 순간들이 이렇게 사라져가는 것이겠지만. 이사 온지 한달 남짓 지났고, 새 일터에 다닌지도 두달이 넘었네. 아직도 수원이 낯설고, 이 직장에 얼마나 다니게 될지 불투명하지만, 좋아하는 사람도 생기고, 하고싶은 일들도 생기고, 집도 많이 익숙해졌다. 지금, 행복해? 라고 물으면 엉? 하겠지만, 감사한 일들이 많다는 데에는 고개가 끄덕. 건강하게 일할 수 있고, 돈도 벌고 있고, 아기도 잘 자라니, 참 고맙다. 그러면서도 뭔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은 여전히 있고. 출퇴근길에 자전거를 주로 타다가 요며칠은 걷는 날이 더 많다. 날이 더 추워지..
아기가 칭얼대서 새벽 다섯시쯤 깼다. 자다가 쉬야를 많이 했는지 기저귀 근처 바지까지 젖어서 잠 못들고 뒤척이는 것 같았다. 젖 먹여 재운 후 잠든 아기의 기저귀를 갈고 바지를 갈아입힌다. 녀석은 잠결에 엄마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까. 영원히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지며 아기를 들여다 본다. 그러고 나니 잠이 깨버려 마루로 나와서 오늘 오전에 있을 이야기 모임 관련 논문을 읽고 있었다. 양도 잠이 깼는지 마루로 나오고, 간만에 둘이 딩굴딩굴 얼굴을 마주보고 목소리 낮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고보니 간밤에, 나도 양도 씻지 않은 채 잠이 들었구나. 퇴근 후 나는 나대로 지치고, 그 무렵 아기 돌보는 일에 양도 지치고. 그래서 종종, 아기를 재우기 위해 불 다끄고 세 식구 모두 자장자장 누워있다가 그 상태로 ..
오늘, 1년 8개월만에 수영장에 갔다. 새로 사두었지만 거의 입지 않았던 까만색 (몸에 착 달라붙는 부드러운 느낌의) 수영복을 입고 물 속을 휘잉 휘잉 헤엄쳤다. 열쇠를 받고 라커룸에 들어갈 때 약간의 긴장과 흥분이 느껴졌다. 수영을 하면서, 씻고 나오면서 이런 저런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는 듯 했다. 물 속에 있으면 이런 느낌이었지, 팔과 손을 이렇게 움직이면 몸이 이렇게 슈욱 나가는 거였지, 수영을 하고나서 잠시 쉴 때의 숨가쁨은 이런 거였지, 운동을 마치고 씻고 나오면 이런 바람이 불어오곤 했지... 다 까먹은 줄 알았는데, 몸은 다 기억을 하는 듯, 자연스럽게 물 속을 움직였다. 수영장에서 작년 가을학기 수강생이었던 ㄴㄱ를 만나기도 했다. 그 클래스는 약간, 인생을 나누기도 한 수업이어서 내겐 좀 ..
주말에 만났던 어떤 사람의 화법이 기억난다.하고싶은 말을 참 담백한 표정과 어투와 목소리로.반가워, 한마디에 담긴 진심이 바로 느껴진달까.꾸미지않은 그 방식이 오히려 마음에 더 전달이 되는 듯. 연어초밥과 데친 꼬막으로 저녁을 거나하게 먹고아기 이유식도 제법 많이 먹이고 내 체력은 고갈.열시 좀 안돼서 아기 재우면서 나도 곯아떨어졌다.낮에 아기랑 산책 삼아 다녀온 텃밭은 온통 작은 풀들.작지만 반짝이는 그 생명력이 내 안 어디엔가도 있겠지. 낮에 들렀던 까페에서 문득 다음 연구는 가난과 관련이 있겠다 싶었다.다시 연구라는 걸 하게 되긴 할까, 의심이 들긴 하지만.ㅋ 허름한 옷에 오래된 모자, 대충 세수하고 나간 내 몰골이세련된 사람들 가득한 까페에서 자각되던 순간, 창피해서 움츠러들었다.내 가난을 들킨 ..
1. 꽃무늬 외투를 입고 싶다. 누빔 원단으로 된 것도 좋고 아니라도 좋고. 온라인 샵에서는 잘 못찾겠다. 네 다섯시간 명동이나 홍대 앞을 누비고 다니던 시절이 그립네. 2. 간밤 꿈에 파아란 바다가 나왔다. 때로 내 꿈에 등장하곤 하던, 푸르고 깊고 차지 않은 바다가 아니라 정말 코발트 빛깔의 바다. 멀리 수평선을 보면서 아 좋다, 했던가. 오늘은 만(灣)에 접해있다는 한 작은 마을 고즈넉한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꿈 속에서와 달리 왠지 피로하고 오고 가는 길이 길게 느껴졌다. 돌아와서 아기랑 길게 잤다. 간만에 낮잠을 곤히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저녁. 어렸을 적엔 낮잠 자고 일어나 깜깜해져있으면 왠지 울고싶었는데. 우리 아기는 오늘 어떤 기분으로 깨어났을까. 3. 이제 수요일이면 컴백홈. 길다면..
남원 여행 8일째.오늘 처음으로 바깥 산책을 했다.봄처럼 따뜻한 날씨, 작은 도시의 관찰자 노릇하며 걸으니 좋더군. 낮시간에 좀 쉴 수 있고, 아기와 단둘이만 있다는 고립감이 덜하지만,일주일이 넘어가니 뭔가 '말이 통하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는 욕구가 슬쩍 생긴다.네, 네 알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네 그렇겠네요, 아뇨 그건 아니구요...가내가 요즘 주로 하는 대사들.이런 말들 말고, 좀 길게 내 마음과 내 생각들에 관해 이야기하고그 사람의 느낌과 생각들도 들어주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중이다.이런 대화가 안된다면, 이야기를 담은 글들, 소설이나 남의 인생 서사들이라도좀 듣고/읽고 싶다.이런 바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내가 참 좋은 친구들과 만나며정서적, 지적 유대 속에서 살아왔구나, 한다.
몸의 변화 두가지.하나는 피부. 때미는 목욕을 간만에 하고나서, 내 팔과 다리가 요렇게 보들보들 하구나, 새삼 알았음.임신 후부터 집에서 샤워만 했고, 출산 후로는 샤워도 뭐 대충 했더니;;;앞으론 때목욕 종종 해야겠당, 몸을 맡기고 싶은 세신사 아줌마도 생겼으니께.ㅋ또하나는 내 오리궁댕이가 사라져버린 것.사춘기 이후 내 바디의 심블과도 같은 오리궁댕이가, 세상에, 어느날 보니 없어져버렸다ㅜ살이 많이 빠지면서 뱃살, 허벅지살과 함께 궁댕이살도 샤라락 사라져버렸나보다.다시 체중이 늘면 어떻게 되려나 궁금하다, 어떤 순서로 회복될지. 남원에 왔다, 피난.낮시간에 아기 돌봐주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좀 편해지려나 싶어서.밥도 청소도 부담이 훨씬 줄어드니 그것도 나을 것 같고.한편으론 좀 여유가 생길 것에 기대가..
어제 진짜 간만에 대중 목욕탕에 갔다.우리 동네에서 제일 괜찮은 데라고 생각하고 갔는데위생상태가 별로더군.너무 피곤해서 때미는 아주머니께 때를 밀어달라고.돈 드리고 하는 거지만 나보다 연세 많은 분이땀흘리며 내 몸을 씻어주는 게 좀 죄송스러웠는데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게 해놓고도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첨부터 반말하며 내게 인생의 가르침을 막막 주셔서오히려 마음이 참 가벼워졌다.자주는 아니라도 가끔 그 아주머니께 몸을 맡기러가고싶을 정도로.ㅋ 아기 이불 위에 까는 매트를 만든답시고원단 사이트에서 천을 주문한지 몇 주가 지났건만진도는 오분의 일도 못나갔다.그래도 가끔 하는 바느질이 좋다, 명상시간처럼 힐링이 되거든.문제는 이 사이트에서 뉴스레터를 보내주는데자꾸만 천을 사고싶다는 거.심지어 오늘은 커튼천을 사고싶어..
어젠 록산나 선생님 장례식이 토론토에서 있던 날.간밤엔 문득 선생님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게 잘 믿어지지 않았다.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홀연히 여길 떠나는 것 같다.엄마가 가시고 나서도 아주 자주 이렇게 믿어지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는데.지금은 어떻지? 아직도 꿈 속에선 엄마가 여전히 내 곁에 계시는 걸 보면,여전히 그 당황스러움 속에 있는지도. 토론토에서 안젤라가 페북 쪽지로,록산나 샘 돌아가신 거 알어? 샘 연구실 청소하러 갔는데 니가 샘한테 쓴 카드가 있더라,라고 했다. 그 쪽지를 한참 들여다보며, 쓸쓸해졌다.이 세상을 떠난다는 건, 자신 앞으로 온 카드 따위를 두고 가는 일인 거 같아서. 오늘, ㅅㄴ언니가 일욜마다 일한다는 까페에 놀러갔다.고즈넉한 일요일 오후, 언니를 만나 생기를 얻었다.이..
이모가 다녀가셨다. 엄마의 두번째 동생. 삼십대 중반부터 우리집 가까이 사셔서 엄마와 가장 가까웠던 이모.너무 더웠던 지난 여름, 아기를 낳은지 2주밖에 안돼서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내게 오셔서 미역국을 끓여주시고 아기 기저귀를 매일 아침 개켜주셨는데, 이번엔 유난히 추운 날들 며칠을 우리집에서 머물다 가셨다.그 사이 나는 엄마되는 연습을 좀 했고, 아기는 단단하게 자랐다. 이모는 시금치 나물이랑 파래무침, 엄마식 찜닭과 쇠고기 국을 만들어주셨다.진짜 오랫만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차려준 밥상을 받으니 입맛이 돈다.가시는 날까지 집청소 알뜰히 해주시고, 잘 지내라며 여러번 거듭 작별인사를 하는 그 눈빛.찡, 하고 마음이 더워진다. 이모랑 둘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자연스레 엄마 이야기로 이어진다.우리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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