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자씨에게 전율을 느낀 영화, 그런 광기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싶어서. 그 여자의 얼굴에, 아들을 유괴당하고 망연자실 혼자 집을 지키는 의 전도연이 겹쳐보이기도 하고, 세상의 엄마들이 다 겹쳐졌다가 떠나가기도 하더라. 압권은 맨 처음과 맨 마지막 씬, 엄마의 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건, 도준의 다섯살 적 기억에 대한 엄마의 절규, 그리고 "엄마 없니"하고 오열하는 장면. 읽을 거리도 말할 거리도 많은 영화, 봉준호는 이제서야 겨우,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듯.
처음엔 낯설기만 했는데 여행의 마지막 즈음엔 이들 속에서 편안해졌다. 바라보고 눈 맞추어도 좋고 다른 곳을 바라봐도 좋고 서로 웃어줘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은. 올망졸망 앉은키를 맞추어 모여있는 이 사진이 편안한 것은 모두 같은 곳을 쳐다보지도 모두 같은 표정을 지어서도 아닐 것이다. 이즈음의 나는 혹은 우리는 혼자 있어도, 사람들이 꼭 나를 인정해주거나 사랑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하는 마음의 힘이 생겼기 때문일 거다. 최근에 들은 어떤 문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자주 봐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은 겁니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면 이 세상 어딘가에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습니까. 그냥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마음, 그게 소유하지 않고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예전 같았음, 그런 사랑은..
출석을 위해서 들었던, 그것도 늦게 기어들어가 들었던 수업에서 만난 홍은숙 교수. 그의 수업 장면에서 아주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신 이론의 한계 지점을 지적했던 한 학생의 질문에 너무나 기뻐하며 '좋은 질문'이라 웃던 그 표정이다. 완결된 지식이 아니라 성장 과정 중의 지식을 교실에 가지고 와서 함께 논의하고 그에 대한 비판과 지적을 기쁘게 듣는 것. 오래된 (남의) 이론들을 교실에서 되풀이하거나 자신과는 다른 의견을 가진 학생의 발언에 불편해하지 않는 교사는 정말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가끔, 조한 선생님의 홈페이지에 들르면, 그가 얼마나 교실에서 열정적인지 알겠다. 뽀송뽀송한 아이디어들을 교실에서 풀어내고 그곳을 새로운 지식을 구성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과정으로서의 강의. 그의 강의를 한번도 들어본 적 없..
"숫자는 사실 무미건조하다. 흰색 종이에 검정색 잉크를 일정한 모양으로 입혀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상상력이 필요했다. 숫자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 일이다. 4명의 기자들은 "오직 증인으로서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WHO 보고서에 언급된 나라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죽어가는 이들과 독자들의 '눈맞춤(eye contact)'을 주선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쓴 기사에는 출산 과정이나 사소한 질병으로도 숨져가는 캄보디아, 말라위, 러시아, 과테말라, 잠비아 등지의 여성과 어린이들이 그려진다. 허름한 병원, 도착하자마자 숨진 에이즈 환자들의 주검과 배우자들을 잃은 남녀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한 병원의 모습이 그려진다. 기자가 현지 병원에서 만났던 어린이가 끝내 숨졌다는 소식은 보스턴에..
내일 오후 1시에 짧은 글 하나를 발표해야하는데, 자료만 정리해놓고 아직 시작도 안하고 있다. 이번 주에 아이디어가 좀 발전하긴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아이디어들은 혼자서 그 모양을 바꾸고, 글을 쓰기 전에 예상했던 결론은 비껴나가기 마련이다. 요는, 글을 써봐야지 어느 방향으로 굴러 어디에 다다를지 알게된다는 것, 고로 글을 막상 쓰는 과정이 본격적인 작업이라는 것. 발표 전까지 16시간이 남았다. 저녁 약속에 차까지 한 잔 마시고 이 늦은 시각에 학교에 '기어올라온' 것은 이런 절박한 사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연구실에 왔더니, 같은 연구실 쓰는 한 선생님이 연구실 안에서 전화를 받고 있다. 전화기 저편의 사람은 이 선생님의 선배인 듯 한데, 이 사람이 쓰고 논문에 대해 세세히 ..
지난 미쿡 여행 사진 몇 개. 내 머릿 속 샌프란시스코는 언제나 태양이 비추는, 소매없는 옷을 입은 사람이 사시사철 거리를 누비는 뭐 그런 이미지였다. 그런데 샌프란에 머물렀던 이틀동안 내내 흐렸고 (떠나는 날 반짝 해가 나더군) 특히 버클리 대학에 있었던 날엔 비도 주룩주룩 내렸다. 미쿡 대학 다니는 애들은 캠퍼스 풀밭에 누워 일광욕 한다길래 나도 그래볼까 내심 기대했었는데 우산도 없이 비맞으며 우중충한 캠퍼스 구경 좀 하다가 말았다. 캠퍼스 돌아다니면서 발견한 것 하나는 이 학교 여학생들은 절대 높은 굽 구두를 신지 않는다는 것. 다리 짧고 뚱뚱한 여자애들도 다들 청바지에 운동화 아니면 플랫 슈즈 신고 다닌다. 팔십프로 이상이 맨투맨 티에 가방도 거의 백팩에 화장한 여학생은 찾아보기 힘들다. camp..
지도 교수님 '모시고' 다닌 길이라, 여행의 자유를 만끽하진 못했지만 몇 순간은 기억에 남는다. 큰 나무 숲 물가에서 불 피워 고기 구워먹었던 조용한 저녁. 하얀 포말이 빗물 처럼 온몸에 튀는데도 계속 웃음만 나던 폭포 앞의 낮. 차가운 기온과 뜨끈한 수온 사이를 오가던 노천 스파에서의 밤. 너무너무 큰 나무 앞에서 그 삶을 막연히 가늠하던 그 오후. 산꼭대기 눈이 녹아 거칠게 흐르는 강물 앞에 가만히 앉아있던 낮. 그 순간들의 공기, 하늘, 햇살, 빗물, 그리고 내 마음을 담아둔다. 폭포 앞, 소낙비처럼 물방울이 튀는데, 그래도, 좋다고 웃는다,
장장 11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견디다 못해 선택, 김기덕 각본이라 보기 싫은 마음+호기심이 뒤죽박죽되어서 봤다. 예상 외로 텍스트는 풍부하고 배우들은 제법 괜찮았다, '소간지'는 처연한 분위기를 풍겼고 강지환은 여전히 남자 아이로 남아있는 어른을 잘 보여주었다. 김기덕의 관심은 언제나 남성 자아의 (모성적 혹은 창녀적) 여성 대상을 통한 성숙 과정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영화에선 두 남자가 서로에게 기대어 성숙해간다. 그래서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존재감은 무대장치보다 가볍다. 말할 것도 없이, 두 남자의 성숙 과정은 우스꽝스럽게도 자기중심적이고, 참혹하게도 폭력적, 현실적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이 영화의 어조가 진지함인지 빈정거림인지 헷갈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두 남자의 우정은 유아적이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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